티슈 제작기 ①
이런 거 하자 해서 시작해도, 대부분 흐지부지 되더라고예.
12월 중순, 우리는 두 번째 종강을 앞두고 있었다. 술자리에서 “방학 동안 뭔가를 더 해보면 어떨까” 하는 이야기가 나온 참이었다. 우리 세명은 모두 디자이너이고, 여기서 말하는 '뭔가'는 작업을 의미한다. 사투리에서 드러나듯 진수는 부산에서 왔다. 유명한 편집샵의 그래픽 디자이너였고, 지금은 성수동에 자기 가게를 차렸다.
진수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 처음은 아니라는 듯, 이미 여럿 그런 사람들을 겪어 봤다는 듯이 방어 태세를 취했다. 이해할 수 있었다. 의지와 능력이 있어도 여럿이 함께하는 일은 내 마음처럼 되지 않을 때가 있으니까. 이건 조별과제와 같다(심지어 학점이 안 걸려있는). 하지만 나 역시 그런 프로젝트를 여러 번 경험해 봤고, 중간에 흐지부지되는 일은 더는 사양이었다. 오히려 고마웠다. 진수는 도발 속에 자신의 의지를 넌지시 드러내 보였다.
책은 아이고, [진]인데.. [진]은 그냥 [진]인데예.
[진(zine)은 얇은 독립 출판물로, 팬진(Fanzine)이 축약된 단어입니다. 개인이나 단체가 독자적으로 제작하며, 정해진 틀이 없어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 생성형 AI
글이나 그래픽을 종이에 인쇄해 하나의 뭉치로 제본한 것이지만(혹은 ‘엮지’ 않은 그 무엇이라도), 아무튼 책은 아니라고 한다. 책과 비슷하지만 ‘출판’할 필요는 없고, 그렇기에 출판사를 거치지 않아도 된다. 제약 없는 자유로운 제작 방식이 특징이다.
[진]을 만들자는 아이디어는 진수에게서 나왔다. 진수는 [진]에 관심이 많았다. 만들어보기도 했고, 심지어 그 무렵 그는 [진]에 대한 논문을 쓰는 걸 고려 중이었다. 디자인 전공이 아닌 공대출신 이어서일까? 진수의 디자인은 마치 [진]이 갖는 특징처럼 틀에서 벗어나 있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전공과 비전공 사이의 애매함을 가진 나와 진수처럼 비전공자였던 현우는 [진]을 잘 몰랐지만, 막연함 보다는 기대라는 감정이 앞서는 중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진]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티슈'로 할까예.
진수는 이런 건 쉽게 쉽게 정해야 한다는 듯 툭 던졌다. 술기운도 올라와 있었다. 나누리잡화점 구석, 바닥에 앉아 있던 진수는 눈앞의 티슈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기대고 있던 벽에서 등을 떼고 위를 돌아봤다.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려는 듯, 주황색 벽에 매달린 티슈가 보였다. 쉽게 뽑아 쓰고 버리는 티슈. 쉽게 시작하고, 가볍게 끝내자는 의미였을까?
일단 이름을 정하면 뭔가를 시작한 느낌이 든다. 어떤 내용이 들어갈지, 어떤 형태가 될지 알 길은 없지만 우리(진수, 현우, sen)는 각자 『티슈』에 들어갈 내용을 10쪽 분량씩 채우기로 했다. 마침 이제 방학이니, 개강 전에 끝내는 일정으로. 술은 마셨지만 흐지부지되기엔 정신이 꽤 또렷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