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슈 제작기 ②
며칠 사이에 새해를 맞았다. 세상은 여전히 어수선했고, 우리는 『티슈』라는 현실 문제를 직면하고 있었다. 술자리 약속이 뜨거운 거라면, 현실 문제의 속성은 차갑기 그지없다. 우린 다시 성수동에 모였다.
『티슈』는 우리가 만들기로 한 zine의 이름이다. 우린 종강 무렵 가진 술자리에서 방학 중에 zine을 만들자고 섣부른 약속을 한 상태다. 잡담이 이어지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시선은 목적지 없이 허공을 떠돌고 있었다. 이윽고 질문을 던진다.
"우리 이거 왜 하는 거지?"
모두의 머릿속에 흐리멍텅하게 있던 의문이 누군가의 입에서 삐져나왔다. zine을 만들자고 선언한 게 2주 전. 맨 정신으로 zine 이야기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자아실현을 위함인지, 잘 만들어 팔고 싶은 건지, 평소에 안 해본 것에 도전하고 싶은 건지, 단순히 함께 작업한다는 것에 의의를 두는 건지. 함께 작업해 본 적이 없던 우리 셋은 서로의 스타일도, 각자의 상황조차도 잘 몰랐다.
디자이너에게 작업은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중간에 길을 잃어도 다시 방향을 잡게 해 줄 북극성은 필요하다. 클라이언트 잡이라면 이런 고민은 하지 않겠지만, 이건 해도 그만이고 안 해도 그만인 작업이다. 개인 작업은 스스로의 동기로, 또 일정의 제약을 받지 않고 작업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티슈』는 여럿이 하는 작업이었다. 최소한의 방향성이 없다면 표류할 게 불 보듯 뻔했다.
각자의 의중을 확실히 알아야 했다. 술 한 잔 들어간 상태에서 나눈 다짐은 간혹 분위기에 휩쓸렸거나 감정이 앞서서 한 경우가 있기 마련이다. 이젠 이성의 시간이다.
무엇이든 좋아, 대신 재밌게 할 수 있는 걸로.
우리는 대전제부터 합의해 나갔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지만, 첫 번째는 ‘재미’였다. 방학 중 짬을 내, 심지어 돈도 되지 않는 작업을 굳이 하려는 이유는 결국 이것뿐이지 않겠는가? zine을 만든다는 건 그 안에 담길 내용물을 만드는 것이고, 각자의 분량을 능동적으로 채워야 한다는 뜻이었다. 작업을 끝까지 이어갈 원동력이 필요했다. 그걸 위해, 다른 제약은 최대한 없애는 게 좋았다.
1. 자신이 채우는 10쪽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2.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나 공통된 소재는 정하지 않고,
3. 그 외 제작에 필요한 규칙은 판형(규격)만 지키는 걸로.
우리는 각자의 10쪽을 위해 위의 세 가지 원칙을 세웠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서로를 잘 몰랐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던 것 같다. 최대한 부담 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자는 의미였다(물론 부담이 안 될 수는 없다).
곧 각자 자신이 채울 10쪽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갔다. 진수가 처음에 구상한 『티슈』는 3명의 디자이너가 각자의 스타일로 채운 그래픽 모음이었다. 그것도 좋았지만, 당시의 나는 좀 더 감정을 담을 수 있는 매개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래픽이라는 세련된 방법으로 다 담지 못 할― 장황하고, 정제되지 않았으며, 그러면서도 담백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렇다, 난 그저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래서 글을 써보기로 했다. 타이포그래피나 텍스트를 멋들어지게 배치하는 편집의 기교를 살린 그래픽 디자인이 아니라, 담백하게 글 자체가 주인공이 되는 결과물을. 세상에 글로 된 책은 1,000억 권도 넘겠지만, 그래픽 디자이너가 만든 zine의 내용물이 오롯이 글인 경우는 흔치 않았다. 글쓰기란 건 내게 거창하고, 새삼스럽고, 또 막연한 일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래픽이 아닌 글로 zine을 만든다는 게 조금은 일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글로 10쪽을, 진수는 그래픽으로 10쪽을 채우기로 했다. 진수는 자신이 그릴 그래픽을 어느 정도 머릿속에 떠올린 듯했다. 현우의 고민이 길어지고 있었다. 현우 역시 디자인과를 나오지 않은 비전공자였고, zine 같은 걸 만드는 게 처음이었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현우는 입을 열었다.
"만화를 그려볼까?"
일본의 4컷 만화 같은 캐주얼한 레퍼런스를 떠올린 듯했다. 일본어 전공인 현우는 일본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일까? 좀 더 개연성이 느껴졌다.
"물론, 만화를 그려본 적은 없어."
그려본 적이 없어도 상관없다. 우린 zine을 만화제에 출품하려는 게 아니었으니까. zine 제작의 관점에서, [글]–[그래픽]–[만화]로 이어지는 구성은 흥미로운 구석이 있었다. 주제도, 장르도 다른 세 가지를 하나의 종이 뭉치로 접할 수 있을 테니. 약 한 달 동안, 우리는 각자의 작업을 해 나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