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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윤당 Jul 03. 2021

덕분에 돈 벌어 먹고 삽니다.

영상 50도와 영하 30를 오가는 사막의 하루같은 애증의 방송작가세월

 지난 달에, 지인을 도와 자막작업을 했던 모 브랜드의 유튜브 광고 영상이 업로드 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작업하면서 영상을 숱하게 봤는데도 완성된 영상을 볼 때는 마음이 설렜다. 아니, 긴장했다는 표현이 좀 더 맞다. 불특정다수에게 공개되는 그 영상이, 그 영상에 쓰인 자막을 보고 사람들의 반응은 어떨까, 재밌어 할까, 지루해 할까, 노잼이라 하진 않을까 등등 쏴- 몰려오는 걱정거리들.

 사실, 자막다운 자막을 쓰는 것이 정말 오랜만이었다. -회사에서 내가 제작하는 콘텐츠의 문구를 쓰는 것들 모두 제외하고-감을 잃었으면 어쩌지 발 동동 구르며 벌렁대는 심장 부둥켜안고 했던 작업인데, 전혀 걱정이 안될 리가.

 

 다행히 본 사람들의 평은 나쁘지 않았다. 아, 긍정적인 표현을 하기로 했으니 긍정적으로 말을 하자. 괜찮았다. 정말 괜찮았고, 자막에 대한 칭찬 댓글도 있었다. 어쩜 이런 표현을 할 수가 있냐, 센스있다 등등.

 긴장하고 흥분하면 말을 할 때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하는데, 영상의 반응을 보고 나니 얼마나 긴장하고 흥분했으면 <날아라 슈퍼보드>에 나오는 사오정의 나방만치 아~~~~ 하고 떨렸겠냐고.

 오예!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5월에 작업했던 그 영상은 지인의 급한 연락 한 통을 받고 성사됐던 작업이었다. 영상제작회사를 운영 중이던 지인이 모 브랜드에서 영상 작업 의뢰를 받았는데, 그 영상에 자막을 써 줄 수 있겠냐고. 일단 지금은 사무실에서 근무 중이니 다시 연락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달력을 보았다.

 이를 어쩐다. 회사의 (독박)업무는 물론이고 오랜만에 프리저브드플라워 제작 주문도 받아서 주말엔 작업에 매진해야 하고, 또 절친한 친구의 결혼식도 참여해야 해서 모든 걸 거의 일주일 만에, 아니 일주일이 뭐야 4~5일 만에 꽃과 자막을 모두 끝내야 하는 일정인데 괜찮을까.


  달력을 들여다보길 10분 정도 지났을까, 지인에게 곧장 전화를 걸어 하겠다는 말을 남겼다. 뭐, 못하는 일도 아니고 나만 잠깐 힘들고 말면 그뿐인데 하고 말자고. 얼마나 급했으면 나한테까지 연락을 했을까 싶기도 하고. 고맙다는 생각도 들었고.



  자막 쓰는 걸 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 얘기를 덧붙이자면, 자막은 한 편의 영상 또는 한 컷의 사진에 몇 마디의 단어를 나열함으로써 영상과 사진으로 어떤 의미를 담고자 했는지 보는 사람들의 이해를 돕는 도슨트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된다. 또한, 자막은 무슨 단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굉장히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기획에서부터 촬영, 편집까지 긴밀한 논의가 있어야 수월하게 작성할 수 있다. MBC에서 방영한 <아무튼 출근!>에 나온 예능 PD가 머리를 싸매고 끙끙댔던 그 작업이 자막작업이었다.



 전화를 마치자마자 나에게 보낸 지인의 메일엔 내가 작업해야 하는 영상 두 편과 함께 브랜드 광고주의 요청사항, 지인이 생각하는 작업방향이 담긴 문서가 있었다. 하나 더, 내가 자막 작업을 하면서 영상의 구성 및 작업방향을 수정해야 하거나 제안할 게 있다면 뭐든 얘기해도 좋다는 말도 함께.

 부담을 덜 주려고 하는 말일까? 그렇다고 해도 편하게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이란 건 틀림없다. 그렇다면 정말 스트레스 받지 않고 작업할 수 있겠군. 오케이, 시작하자.




 간단하게 편집한 영상 두 편의 프리뷰를 마치고 자막을 쓰면서, 자막 파일 안에 영상에 어떤 장치들이 더 필요할지, BGM은 어떤 톤의 음악을 사용하면 좋을지, 영상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어떤 느낌을 살리면 좋을지 참고 레퍼런스도 야무지게 찾는 등 자막작업자의 코멘트라며 상세히 남겼다. 자막을 써 본 사람이라면 알 거다. 영상에 자막만 입한다고 해서 자막에 쓴 단어들이 맛깔나게 살아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많이 생각하고 많이 고민해야 한다. 이 말, 이 단어 하나로 보는 사람의 감각을 일깨워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의 자막 작업 파일을 받아 본 지인이 그랬다.


 "이래서 기술자가 필요한 거군요."



 2011년에 같은 프로그램을 했었던 한 선배가 생각난다. 자막이란 게 대체 무엇인지 '자막의 정수'를 제대로 보여주었던 선배. 사용하는 표현이며, 다양한 표현력이며 무엇을 참고하면 좋고 모르는 걸 물어보면 내치지 않고 항상 가르쳐주었던 그 선배.


 언니. 고맙습니다. 그때 언니를 만나고 나서 지금도 자막으로 돈 벌고 살아요.

 또 다른 선배가 생각난다. 콘텐츠 기획과 구성이란 게 뭔지 맞춤형 교육을 해줬던 선배.

 언니. 언니한테도 고맙습니다. 그때 언니의 교육 덕분에 지금까지 저 돈 벌고 살아요.




 이번에 작업하면서, 10년 남짓 보낸 방송작가로서의 시간이 그립단 생각이 들었다. 다시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 그 고생을 생각하면 돌아가면 안 되는 게 맞긴 한데 -머릿속에서 아주 많이 미화가 된 것 같다. 다들 그렇지 않을까. 심하게 고생했을 때, 힘들었던 거 생각 안 하고 좋았던 것만 추억팔이하는 거. 그거랑 똑같다- 그 때만큼 열정을 쏟아부은 순간이 사실 없었으니까.


 마음만 그렇지, 돌아갈 수 없다.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리워하는 정도로만 지내도 충분하니, 회상은 이 정도로 끝.


 그런데 참! 다시 생각해봐도 처음에 방송작가라는 걸 시작했을 때, 나는 무슨 겁도 없이 무속인들과 함께 하는 심령 솔루션 프로그램에 지원해서 그 프로그램을 또 하게 됐을까. 어떻게 밤 12시부터 새벽 내내 한강, 공동묘지, 폐가, 흉가, 폐건물, 귀신이 많이 나온다고 유명해진 장소 곳곳을 돌아다니며 촬영을 했을까. 그것도 한겨울에.


 생각하면 끝도 없는 이야기는 조만간 길게 늘어뜨려야지. 엉킨 실타래 풀어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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