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흐린 이야기를 쓰다
실눈을 떠 보자. 아주 작게, 최대한 작게...
'이게 지금 보이는 상태가 맞나?'
그런 느낌이 들 정도로 가는 실눈을 뜨면, 그것이 내 시력이 된다. 눈앞에 뭔가가 아른거리는 것 같긴 한데, 명확하지 않다. 그럼 그 상태가 완벽한 내 눈의 상태이다. 잠깐 적응하면 의외로 아주 근접한 거리에서 펼쳐진 손가락의 개수를 셀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주로 소설을 쓴다. 내 이야기를 흥미롭게 펼치는 데에 소질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글쓰기 수업을 들으며 달리 마음먹기로 했다.
'어차피 해보면 늘 거 아닌가? 매일 한 편씩 쓰면 늘지 않나?'
누가 나에게 '무조건 니 얘기를 써!'라고 강요한 적은 없었지만, 내 나름의 도전을 결심한 데에는 원인이 있다. '일간 이슬아 수필집'을 읽고 있는데, 이것이 도화선이 되었다. 핍진성을 돌파하고 지상에 없을 아름다움을 쓰고자 했던 나에게 이 수필집은 새로웠다.
나에게 있었던 일, 내가 했던 생각, 나의 경험, 나의 시간, 나, 나, 나... 나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어떤 상상력을 발휘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상상력을 가미하지 않으면, 오감을 십감으로 만드는 것만 같은 초월적인 아름다움을 묘사할 수 없다.
가슴 무너지는 안타까움을, 전율이 차오르는 폭풍간지를, 영혼이 웅장해지는 장엄한 서사를 쓰기 어렵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글들이 내가 세상에 낳을 수 있는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내가 한 권의 수필집을 읽고 마음을 달리 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설정에 집중하고, 플롯에만 얽매이기보다 온전히 나를 관조하는 여로를 걷고 싶어졌다. 쓰기 위해 자판을 두드리기보다 문자로 꺼내놓은 나를 마주하고 싶어졌다.
자기 이야기를 쓰면 쓰는 거지 눈에 대한 걸 왜 서두에 말하는가? 그것은 내가 선천적으로 시력이 없는 상태에서 지금까지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 편부터 쓰는 나의 표현들은 전반적으로 시력이라는 감각이 직관적이지 않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해해 달라든가, 감안하고 보시라든가 하는 청승맞은 의미가 아니다. 의외로 재미있을 것임을 예고한다. 아예 안 보이는 것도 아니고, 어느 정도 명확하게 보는 것도 아닌 상태. 수통에 물이 남아 있냐고 물었더니 한 방울 남아 있다는 답을 들은 것 같은 아리까리한 상태.
흔히 예상하듯, 소리에만 의존하거나 촉각에만 의존하지 않을까 싶은데,
삐이이이!(X) 온몸과 감정으로 세상을 보았던 내 이야기를 내일부터 올리겠다. 참고로 장애 극복 서사, 그런 거 없다. 그런 구시대적인 개념 별로 안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