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그 가을의 냄새를 기억하나요
“우와, 봄 냄새! 보통 계절마다 무슨 냄새가 있는 것 같지 않아요?”
한껏 물이 오른 봄날에 같이 퇴근하던 동료가 나에게 건넸던 말이다. 대략 4월쯤의 어느 날이었고, 봄날의 마스코트인 봄볕도 슬슬 서산으로 옮겨가는 해를 따라 아련해지는 시간이었다.
봄 냄새라... 정말 그런가 싶어 마치 좁혀 있던 시야를 넓게 키우는 것 같이 마음을 가다듬고 감각을 열어 보았다. 순간, 꽃 향기라든지 풀 내음이라든지 하는 말로는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그런 냄새가 코끝에 닿았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공기 냄새? 봄 공기 냄새? 뭐, 그런 것이었다.
코로 들숨을 마실 때뿐 아니라, 그것은 내 몸이 스치는 공간에서 나를 훑는 바람결을 따라서도 피부에 감지되고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정작 지난 뒤에 다시 떠올리려 하면 결코 찾아낼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어제도 그랬다. 시간이 낮을 떠나 막 저녁으로 들어가기 위해 그 입구에 섰을 즈음, 공간의 한쪽에서 가늘게 아른거리는 햇빛을 배경으로 또 그 냄새가 나를 찾아왔다.
그것은 퇴근길 맞은편에 풀과 나무로 우거진 화단에서부터 오는 것 같기도 했고, 때로는 아이러니하게도 시끌시끌한 차도에서부터 진한 매연 냄새 사이에 섞여 오는 듯도 했다. 싱그러우면서도 조금 묵직한, 그리고 그 와중에 알 수 없는 군더더기들도 약간 묻혀서 떠도는 그것, 바로 가을 냄새였다.
계절에도 냄새가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꽤 많다고 들었다. 어떤 계절에 대한 옛 기억이 머릿속에 잠재돼 있다고 할 때, 그 기억을 자극하는 냄새를 우연히 맡으면 그 계절에 대한 기억이 조금씩 살아나서 그렇다나 뭐라나. 그런데 충분히 근거가 있는 말인 듯도 하다.
마치 어떤 사람의 첫 인상을 보고, 저 사람은 어떻다 하는 이미지를 만드는 것 같이 가을 하면 떠오르는 어떤 기억은 그 시간에 대한 묘한 이미지를 나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아련한 옛 기억을 타고 시간을 거스르면, 듬성듬성 풀과 나무가 자란 잔디밭, 그 한중간에 놓인 평상 위에 나의 가을은 앉아 있다. 그것은 물기를 머금은 풀잎 냄새, 밭의 가쪽에 언밸런스하게 깔린 아스팔트 위를 쏜살같이 지나는 오토바이의 기름 냄새, 저녁 시간에 맞게 노릇하게 굽는 생선 냄새 같은 것들이 섞여 있는 묘한 날숨을 뱉고 있다.
평상 옆에 박혀 있는 커다란 바위 위에 서서 혼자 키 자랑을 하고 있던 나는 신발을 벗고 평상 위로 올라가 거기에 앉아 있는 가을의 무릎에 머리를 놓고 눕는다. 한껏 지루한 듯이 하품을 하며 몸을 뒤틀면 가을이 쉬는 숨을 내 안에 직접 받아들일 수 있다.
이윽고, 멀리서부터 뛰어오는 발소리, 익숙한 친구의 외침이 들리면 나는 몸을 일으켜 잔디밭 가쪽의 아스팔트 길로 급하게 달려간다. 그 와중에도 가을이 쉬는 숨은 깊고 넓어서 바람결에 섞여 금방 나를 따라잡고, 내 코 언저리에 묻은 채 나와 함께 친구의 집으로 초대되어 간다. 친구의 집에서 배불리 저녁을 얻어먹고 나오면, 그 집에서 내가 뒤로한 줄만 알았던 생선 냄새, 찌개 냄새 같은 것들이 가을의 숨결에 묻어 여전히 나를 따라온다.
지는 저녁의 옅은 빛을 느끼며 다시금 아까의 그 잔디밭으로 가보면, 쓰레기를 태우는 매캐한 연기가 밀려오고, 익숙하게 그것을 지나치는 나와는 달리 내 코 언저리에 묻은 가을의 숨은 또 그것을 끌어들여 자기 위에 덧입는다. 그렇게 여러 냄새들에 둘러싸인 가을의 숨은 어느새 그 속에 완전히 섞여 새로운 향기가 되고, 그때서야 그것은 얇게 녹아 내 코 언저리에서 내 기억 속으로 몰래 자리를 옮긴다.
그로부터 몇 주, 몇 달, 몇 년... 그 옛날 잔디밭 가운데 평상 위에 앉아 있던 가을과 긴 이별을 이어오고 있는 지금까지도 기억 속에 몰래 자리한 가을의 숨은 이따금씩 도시 냄새, 책 냄새, 돈 냄새 따위와 뒤섞여 있는 나를 그때의 평상 위로 이끈다.
“이제 가을인가? 가을 냄새가 나네.”
빛이 아스라이 멀어지는 퇴근길에서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새로 알게 된 사실 앞에 짙게 미소했다. 빨간색과 파란색을 섞으면 보라색이 되는 것 같이, 수증기를 가득 안은 구름과 겨울의 찬 바람이 만나면 소복하게 내려 쌓이는 눈이 되는 것 같이... 내 기억 속의 풀잎 냄새와 아스팔트 위를 질주하는 오토바이 매연 냄새, 그 건너편 집의 저녁밥 냄새와 잔디밭 위의 쓰레기 태우는 냄새가 모두 바람결에 섞이면 나만의 가을 냄새가 난다는 것을 이제 알았다. 그리고 그 가을 냄새 아래에 내가 놔두고 온 소박하고 순수한 추억이 지금 이맘때만 되면 내 기억 속 가을 향기를 자극해 나를 그 옛날의 평상 위로 데려간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마냥 웃었다. 거리에 스치는 바람보다 에어컨 바람이 더 절실했던 지난 여름을 딛고, 마냥 심심한 어린 마음으로 저녁 한때를 즐기기보다 바쁘게 움직이며 세상과 싸워야 했던 어른의 시간을 잠시 뒤로한 채 다시금 그 평상 위에 누워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다음 주에는 같이 퇴근하는 동료에게 내가 먼저 말해 볼까 싶다.
“우와, 가을 냄새! 이제 슬슬 가을이 깊은 것 같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