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엣과 여행하는 법
파도가 일었다.
“너무 덥다……. 어디 좀 들어가자.”
그렇게 해서 줄리엣과 카페를 찾아다녔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카페가 있었다. 역시 우리나라 해변이라면 모름지기 카페와 식당 몇 군데를 끼고 있어야 미덕인 법이었다.
카페에 들어서니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우리를 맞이했다.
“우와, 짱 시원해! 어 잠깐, 저기저기저기 명당 자리 겟!“
그렇게 말을 쏟아내더니 줄리엣은 창가 바로 앞자리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자기 여권을 테이블 위에 떡하니 놓고는 이 쪽으로 돌아왔다.
“너, 여권을 그렇게 아무렇게나 둬도 돼?“
“아니, 그럼 어떡해~ 난 지금 핸드폰도 없고 뭐도 없는데. 아? 지갑 있다. 지갑 놓고 올까?”
“그냥 주문 빨리 하고 가자…….“
카운터 앞 메뉴판에는 엄청 많은 종류의 음료가 나열되어 있었다. 미간까지 찌푸려가며 음료를 고심하는 줄리엣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뭐 좀 골랐어?”
“으으, 너무 많아~ 일단 아이스로 마시고는 싶은데. 넌 뭐 마실 거야?“
“블루 레모네이드.”
내 대답에 줄리엣이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골랐어?! 이렇게 많은데?”
“난 보통 이렇게 처음 오는 데서는 시그니처 메뉴 먹거든. 봐봐, 여기 시그니처라고 위에 세 개 있잖아. 블루 레모네이드, 음음 크림 라떼, 로열 밀크 초코.”
“으아, 셋 다 달잖아! 꼭 셋 중 하나만 골라야 해?”
“아니, 내가 언제…….”
달아서 어쩌고 하더니, 줄리엣은 ‘음음 크림 라떼’를 골랐다. 음료는 금방 나왔고, 우리는 명당 자리에 앉아서 시원한 바람을 쐬며 각자의 음료를 한 모금씩 마셨다.
“으악 진짜 달긴 달다! 그래도 다행이야~ 난 또 크림이 들어간다고 해서 뜨거운 것만 되는 줄 알았잖아? 그런데 알고 보니 아이스만 가능하더라구? 캬캬!“
“아니, 너 그거 모르고 시킨 거야?”
“어. 그럼 어떡해? 블루 레모네이드는 네가 먼저 찜했고, 로열 밀크 초코는 아까 편의점에서 초코우유 사먹어서 겹치는데.”
“참 속 편해서 좋겠다, 넌.”
줄리엣은 콧노래를 흥흥거리며 나무 스푼으로 크림을 떠올렸다. 아인슈페너처럼 생겼는데 크림이 위에 머랭처럼 형태를 갖춘 채 얹혀 있는 모양새였다. 크림을 떠올리는 눈빛이 반짝였다.
“단 거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되게 잘 먹잖아? 벌써 절반을 마셨어?“
“어, 나? 단 거 싫어하지는 않아~ 아까도 편의점에서 초코우유 먹었잖아? 그냥 계속 단 음료만 마시는 건 겹쳐서 좀 그렇다, 이 말이지~“
“몇 번 그런 생각 하긴 했지만, 의외로 미식가란 말이야…….”
“왜애 나 딱 봐도 미식가 아니야? 홍홍~ 근데 나 같은 사람을 위한 시그니처는 왜 안 만드는 걸까? 안 달고, 크림 없고 그런 거.”
그 말에 ‘블루 레모네이드……’라고 답하고 싶었지만, 그 또한 달콤한 음료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말을 삼켰다.
“글쎄, 그런 음료는 아무래도 임팩트가 좀 떨어지지 않을까? 홍차 같은 종류는 아마 가능할 텐데, 아무리 과일 가향 같은 걸 한다고 해도 한계가 있으니까. 요즘에는 인스타에 올릴 법한 음료가 잘 팔리기도 할 거고.”
“그래도 잘 고민해 보면 의외로 좀 있을 지도? 예를 들면 음,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조합으로 말이야. 바나나랑 말차를 섞는다든가~”
“으아……. 그건 임팩트‘만’ 있을 것 같은데?”
“왜애, 모르는 일이지. 바나나는 거의 모든 재료랑 궁합이 좋다니까? 들어봐, 내가 읊는 재료 조합 중에 이상한 거 있나. 딸기 바나나, 파인애플 바나나, 키위 바나나, 바나나 라떼, 오트밀 바나나, 바나나 팬케이크, 초코 바나나, …….”
“아니, 알았어, 알았어…….”
쏟아져 나오는 줄리엣의 바나나 조합들에 압도당해버렸다. 일단 수긍한 다음, 블루 레모네이드를 저어가며 창밖을 바라봤다. 레모네이드와는 전혀 상관없는 파란 색소가 음료의 청량감을 더해주면서 바다 풍경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푸른 파도가 여름 햇살을 끊임없이 부수어내며 반짝이 가루들로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줄리엣이 읊은 바나나 조합 중에 과연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어쩌면 바나나와 말차도 괜찮을 지도……?
“아름답다.”
바나나 이론을 검토하고 있었는데, 문득 줄리엣이 창밖 풍경을 보며 감상을 내뱉었다. 바나나 때문에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내 시선도 줄곧 바다를 향해 있던 참이었다.
“넌 참 솔직해서 좋겠다.“
“왜?”
“나도 바다 풍경이 예뻐서 보고는 있었는데, 네가 방금 말로 아름답다고 하니까 진짜 저 풍경이 되게 아름답다고 느껴졌거든.”
“에잉, 언어의 마법을 이제야 깨달았단 말이야?”
“언어의 마법?”
“왜, 마법이란 게 별거겠어? 수리수리 마수리, 주문을 외기만 해도 현실이 되게 하는 게 마법이잖아. 그렇다면 언어도 다를 바 없다고 봐. 이름을 갖다 붙이기만 하면 그걸 듣는 순간 그 이름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되니까.”
듣고 보니 이 또한 그럴싸한 이론이었다. 나는 잠자코 줄리엣의 말을 마저 경청했다.
“방금도 그래. 내가 ‘아름답다~’ 라고 하니까 진짜로 이 풍경은 아름다운 풍경이 되었잖아? 그치만 내가 말하기 전까지는 너도 어렴풋하게 생각만 하고 있었다, 이 말씀이지!“
“하긴, 밖에서 저 바다를 보면 이렇게까지 예뻐보이진 않을지도……. 아무튼 우리는 여기서 시원한 에어컨 바람 맞으면서 감상하고 있으니까.”
줄리엣은 크림을 뜬 숟가락을 휘휘 돌리며 말했다.
“떼잉, 그런 식으로 관점을 하위호환 시키지 말라구~”
“관점을, 하위호환?”
이게 적절한 표현인가? 관점을 하휘호환한다고도 말할 수가 있나?
“언어의 마법을 좋은 데에 쓰면 더 효과적이란 말씀~! ‘와 지금 너무 좋다!’, ‘이거 진짜 맛있다!’ 이런 말을 입에 달고 살면 진짜로 인생이 반짝반짝해진다니까?”
“그래, 그게 언어의 마법사님의 관점이란 말이지…….”
그렇게 말하면서 줄리엣은 나무 숟가락을 가볍게 휘둘렀는데 그게 몹시 신경쓰였다. 마치 말솜씨를 위한 지휘봉 마냥 휘둘리고 있는 숟가락에는 크림이 위태롭게 얹혀 있었다. 용케 떨어지지 않고 있구나, 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