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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도트 게임과 재료 파밍

0과 1의 애프터라이프

by 구의동 에밀리

나는 언뜻 토리엘을 떠올렸고, 그 때와 지금의 게임이 둘 다 투박한 도트 그래픽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이 게임이 아무리 AI를 적용했다느니 어쩌니 해도, 여전히 그래픽은 도트고 대화는 텍스트 입력창으로 주고받는 형태였다. 투박하기 그지없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그럴수록 더 몰입되었다. 어쩌면 엉성한 표현력에서 생긴 구멍을 머릿속 상상력이 채워나가면서 생동감이 자라났는지도 모른다. 직접적인 시각 자극은 그 자체로 한계가 있지만, 상상력이 만들어내는 세계는 그 깊이와 실재감에서 비교할 수 없었다.


토리엘을 만났던 <언더테일>도 도트로 만든 게임이었다. 하지만 그래서인지 <언더테일> 특유의 음산한 분위기가 더 돋보였고, 게임 속 세계가 나를 휩싸는 기분마저 들었다. 게다가 진행 방식도, 등장하는 몬스터들을 죽이거나 살리거나 하는 형태라서 더 괴기스러운 인상을 주는 게임이었다.


토리엘은 등장인물 중 하나였다. 플라위라고 하는 꽃 모양 몬스터 다음에 나오는 캐릭터였다. 나는 이 캐릭터가 건네는 말과 보여주는 친절에 따스함을 느꼈다. 그래서 절대 죽이고 싶지 않았으나, 공략을 읽지 않고 플레이했더니 의도치 않게 계속 죽이게 되었다.


다시 게임의 처음으로 돌아와서 재시도를 하는데, 이번에는 플라위가 갑자기 말을 걸었다. 왜 계속 토리엘을 죽이는 거냐고, 살리고 싶어서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계속 죽이고 싶어서 그러는 거냐고.


분명 나는 게임을 리셋하고 돌아왔는데, 어떻게 저런 멘트가 나올 수 있지? 이놈의 몬스터가 마치 내 죄스러운 전생을 들춰버린 것만 같아서 소름이 끼쳤다. 너무 기분이 찝찝해진 나머지 게임을 접었고, 다시는 플레이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줄리엣을 보며 친밀감을 또 느끼고 있었다. 도트 게임이 이렇게 몰입감 넘칠 일인가? 아니면 그저 이런 스타일이 내게 잘 맞을 뿐인가?


아무튼 그렇게 줄리엣은 ~제로X제로~에서 가장 친한 NPC 친구가 되었고, 파밍도 같이 나가는 상대로 거듭났다. 아니, 물론 줄리엣에게는 '파밍'이 아니라 재료 수집이라고 이야기했지만……. 그래도 평화롭게 버섯을 캐거나 돌을 깨서 수정을 채취하는 정도니까, 줄리엣이 위험에 빠질 일은 없었다.


"근데 나 공격 마법도, 방어 마법도 모르는데. 몬스터라도 나오면 어떡하지?"


줄리엣이 버섯을 바구니에 담으며 물었다.


"걱정 마. 남쪽 숲에서는 그렇게 강한 몬스터는 별로 안 뜨니…… 아니, 안 나타나니까."

"그렇구나. 다행이네!"

"그리고 만에 하나 몬스터가 나타나더라도, 내가 마법으로 퇴치하면 그만이야. 걱정 마."


하지만 역시 말이 씨가 되는 법일까? 말을 마치자마자 줄리엣의 등 뒤에서 몬스터가 슬금슬금 나타났다.


"켄타우로스……? 저게 왜 여기서?!"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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