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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치원 Sep 03. 2023

솔직히 말하면 조금 무섭다

스타트 신호는 울렸는데

 이제 캐나다 생활이 한 달도 남지 않았다. 주말 세네번이면 떠나는 시간. 많은 사람들에게 기약 없는 재회를 고하며 떠나게 된다. 모든 것들이 부질 없이 느껴져 괜시리 나를 자꾸 놓게 된다. 하나라도 더 소중한 기억을 만들어야할 시간인데도. 가끔은 감정에 사로잡혀 울고싶기도 하다. 앞으로 닥쳐올 미래와 확정적인 그리움 덕분이겠다.


 지난 목요일엔 퇴사를 했다. 사실 아직까지도 실감이 잘 가지 않는다. 사수분께서 주신 손편지 한 장만이 나를 자각시키는 유일한 매체. 이제 밴쿠버에서 할 일은 많이 남지 않았다. 남은 시간을 무탈히 보내고, 9월 11일부터 15일까지 미국을 다녀오며, 9월 25일에 출국하는 일이 전부다. 가져온 건 별로 없는데 마음이 너무 가득찼다. 이 순간을 평생 그리워하며 살겠지. 이제야 가을이 시작된 듯한데 마음은 벌써 춥다.


 1년 전인 2022년 9월에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탔다. ESTA 문제로 시작부터 골때린 워킹홀리데이. 탑승장에 들어와 이제 진짜 간다면서 외할머니에게 전화를 했던 기억이 난다. 훈제연어 향이 (지금도) 가득한 마린 드라이브. 어떻게 버텼는지도 모를 2088 Beta Ave. 후회되는 건 없지만서도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하는 순간들은 많다. 어학원을 다녔더라면. 내가 준호형이랑 살지 않았더라면. 그 때 그 아이와 만났더라면 혹은 만나지 않았더라면. 더 많은 곳을 여행했더라면. 그러나 나의 세상엔 평행우주가 없다. 그래서 같은 시간으로부터 이어진 다른 선택의 결과를 알 수가 없다. 정승제 선생님은 인생이 알 수 없기 때문에 재밌는 일이라고 했지만 가지지 못한 삶엔 먼지가 쌓일 기미가 없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무섭다. 새로운 시작이다. 출발 해야하는데 아직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몰라서 섣불리 발을 뗄 수가 없다. 졸업하고 어떤 일을 시작한다고 해서, 내가 그걸 평생할 것도 아닌데 자꾸 신중해진다. 완벽에 대한 쓸데 없는 강박. 마치 옛날에 메이플스토리 능력치 4,4 맞추겠다고 주사위를 마구 굴렸던 것처럼. 사실 그거 조금 어긋난다고 별 일 없는데 말이다. 첫 직업을 선택하는 것은 능력치보다야 큰 일이라지만 아무튼.


 3년 뒤의 나는, 10년 뒤의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 때 쯤에 이 글을 웃으면서 봤으면.


+)


회사 단톡방 마지막 메세지를 남긴다.


사실 어제 아침에 출근하면서 '건배사 시키면 어쩌지…?' 하는 마음에 일기장에 상상의 건배사를 적었습니다. 아쉽게도(?) 시키시는 분이 없고, 저도 용기가 없어 먼저 말하지 못했는데 늦게나마 조금 고쳐 여기 올립니다.


언젠가 떠날 새파란 워홀러에게 값진 경험과 사랑을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인터뷰부터 시작해 늘 함께해주신 수지님.

열차 타는 시간을 기다리게 해주신 라나님.

개떡같은 기획을 찰떡같은 디자인으로 바꿔주신 예빈님.

The one who always treat me with smile, Kana Sang.

이 방에 있진 않지만, 제 연애 이야기를 항상 재밌게 들어주신 클로이님.

이 모든 걸 있게 해주신, 늘 뒤에서 넓게 챙겨주시는 팀장님.


1년이 짧음에도, 많은 시간을 함께했네요. 이 워킹홀리데이를 평생 그리워하며 살겠죠.

절대 잊을 수 없는 그 기억들을 따뜻하게 만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떠나기 전에 다시 한번 찾아뵐게요. 사랑해요 (회사이름 자체검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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