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축 허가제(레17:3-4) vs 자율도축제(신 12:15)
현대 사회에서 확산되는 단 하나의 이념은 - ‘먹고사니즘’이다. 다시 말해,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는 말이다. 반대로, 어떤 종교나 철학, 이념도 먹고 사는 문제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가 되겠다. 현대인들이 얼마나 계산적이고 현실적인가에 대한 비판으로도 사용되지만,역사적으로도 증명된 문제이기도 하다.
군대에서 병력을 사적인 목적을 위해 동원한 경우와 병사들의 식재료를 삥땅 치는 것 중에서 후자가 더 큰 죄로 취급받는다고 한다. 이유는 잘 먹지 못하면 전투력 손실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라나. 이렇게 먹는 문제는 어떤 문제보다 중요한 문제이며 식량은 어떤 자원보다 우선되는 자원이다. 오늘 본문에서도 또 먹는 문제가 나온다. 그것도, ‘고기를 먹는 규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최초의 인류에게 허락된 것은 채식이었다. (창 1:29) 이 구절에 의하면 인류는 원래, 채식 동물로 창조 되었던 것 같다. 그러다 노아의 홍수 이후에 더위와 추위가 생기고 지구 환경이 급격히 바뀌자 하나님은 육식을 허용하게 된다. (창 9:2~3)
그리고 세월이 지나 출애굽 초기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명령과 가나안 입성 직전의 규정이 또 다시 바뀌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출애굽 당시에는 처음에는 진영 안팎에서 소, 양, 염소를 잡을 경우에는 반드시 회막(성막) 문 앞, 즉 여호와 앞으로 끌고 가서 예물을 드려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피를 흘린 자(살인자)로 간주되어 공동체에서 끊어질 것이라 경고한다. (레위기 17:3~4) 그러다 가나안 입성을 앞둔 시점에서는 ‘각 성에서 마음대로 잡아 먹어도 되는 것(신 12:15)’으로 법이 갱신되었다.
출애굽 시작할 때 왜 성막에서만 가축을 잡도록 했을까? 우선, 성막 앞에서 종교 의식을 위해서만 가축을 잡을 수 있으면 어떤 일이 생길지 생각해 보자.
고대 세계(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 세계 전체)에는 '세속적인 푸줏간(도축장)'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생명을 끊는 행위는 신의 영역을 건드리는 두려운 일이었기에, 모든 도축은 반드시 신전에서 제사장의 주관하에 이루어졌다.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말한 '시장의 고기'도 헬라 신전(아폴로, 비너스 등)에서 제물로 바쳐진 뒤 시장으로 유통된 고기를 뜻한다. 그러기에 고대 사회에서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곧 종교 제의에 참여하는 행위가 된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당시 종교 제의는 하얀 천으로 둘러싸인 성막 안에서 깨끗한 옷을 입은 제사장이 엄숙하고 근엄하게 집례를 하는 모습이라기 보다는 거대한 야외 도축장에서 제사장이 백정 같은 모습으로 피칠갑을 뒤집어쓴 장면에 가까울 것이다. 수십 마리의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 피비린내, 내장을 태우는 연기, 파리 떼가 가득한 공간을 맨발로 피가 흥건한 바닥을 미끄러지지 않게 걸어 다니며,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고 피를 제단에 뿌리는 제사장을 상상해 보라.
회막으로 끌고 온 짐승을 화목제로 드릴 때, 율법(레 7장)은 짐승의 '가슴(흔들어 바친 요제)'과 '오른쪽 뒷다리(들어올려 바친 거제)'를 제사장의 몫으로 돌렸다. 이는 농사를 짓지 못하는 레위인과 제사장들을 위한 가장 확실한 생계 보장 수단(종교세)였다. 도축을 중앙으로 집중시키면, 백성들이 얼마나 고기를 소비하는지(경제 규모)가 파악되고, 제사장들에게 돌아갈 몫이 중간에 새지 않고 정확하게 분배되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도축이 이렇게 번거롭고 (성막까지 가야 하고), 나누어 먹어야 하는 행사다 보니, 평민들이 일상에서 고기를 먹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의 평소 식단은 빵, 올리브, 무화과, 렌틸콩, 양젖(치즈) 위주의 소박한 채식이었을 듯하다. 고기는 명절이나 귀한 손님이 올 때만 먹는 초호화 특식에 가까웠겠지. 그래서 전체 고기 소비를 통제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가축을 몰래 잡아서 혼자서 먹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우선, 소를 끌고 성막까지 가는 길에 눈에 띌 것이다. 냉장고도 없던 시절이라 소 한 마리를 잡으면 나오는 그 엄청난 양의 고기를 상하기 전에(보통 당일이나 이틀 내에) 다 먹어 치우려면 가족뿐 아니라 친척, 이웃, 그리고 동네의 가난한 자들과 고아, 과부, 레위인까지 다 불러 모아 거대한 동네 잔치(바비큐 파티)를 열어야만 했을 것이다.
‘이렇게 고기 먹기 어려워서야 고기 한 번을 먹겠냐’고 투덜거리겠지만, 하나님은 고기 먹는 것을 까다롭게 만드심으로써, 혼자 몰래 고기를 독식하는 이기심을 막고 "고기를 먹으려면 반드시 공동체와 나누어라"라는 강력한 나눔의 법을 제정하신 것은 아닐까.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200만 명이 진을 치고 살았다. 만약 각자 텐트 뒤에서 마음대로 짐승을 잡고 피와 내장을 버렸다면, 며칠 못 가 전염병이 창궐했을 것이다. 도축을 중앙(성막)으로 통제하고 피를 흙으로 덮게 한 것은, 척박한 광야 환경에서 백성의 생존을 지키는 탁월한 '공중 위생법'이었다. ‘총균쇠’에서도 이야기하거니와 인류가 겪은 팬데믹은 대개 동물이 매개가 되는 경우가 많다. 가축을 끌고 다녔던 이스라엘 공동체에서는 이런 위생은 매우 엄격한 관리가 필요했다.
그런데 신명기에서는 도축에 대한 규정이 바뀐다.
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복을 따라 각 성에서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가축을 잡아 그 고기를 먹을 수 있나니 곧 정한 자나 부정한 자를 막론하고 노루나 사슴을 먹는 것 같이 먹으려니와 (신명기 12:15)
다시 말해, 각 성에서 마음대로 고기를 먹으며 제사와 무관하게 사적인 도축을 허용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한 마디로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도축 신고제의 경우, 이스라엘이 생활하던 장소는 광야의 텐트촌이었다. (지금의 난민촌과 비슷한 느낌이 아니었을지) 하지만 신명기는 가나안 정착 이후, 각 성에서 지파별로 흩어져서 사는 모습을 상정하여 주어진 말씀이다. 가나안 정착 이후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흩어져 사는 모든 지파들이 가축을 일일이 회막에 데려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인구밀도도 낮아져 질병이 퍼질 위험도 낮으며, 목축을 할 수 있는 땅도 늘어나 가축의 마릿수도 많이 늘어나 육류 소비를 제한할 필요성도 낮아질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율법은 시대나,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일까?’ 예수님이야말로, 이 문제를 두고 가장 치열하게 갈등하고 논쟁하신 분이다. 율법학자들은 상황(사람의 고통)을 무시하고 문자적 규정에만 집착하여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는 것도 밀밭에서 밀을 까 먹는 것도 불쾌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으며 음식 자체가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더럽힌다”며 모든 음식의 제의적 제한을 폐지하셨다.
오늘 묵상하는 레위기와 신명기 말씀도, ‘변형이 불가한 절대 경계 - 생명 존중(피째 먹지 말라)는 것과 하나님 사랑(우상 숭배 금지) -만 지킨다면 그 외의 외적 형식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여러분은 삼겹살이나 족발을 좋아하는가? 순댓국이나 선지국, 오징어나 문어는 어떤가? 만약 좋아한다면, 당신은 율법을 어긴 사람이다. 부정한 짐승과 피를 머금은 고기를 먹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현대 기독교인들은 부정한 음식을 먹는 것에 제약이 없다. 이것은 어느 날 갑자기 바뀐 것이 아니다. 예수님부터 사도 바울 등, 많은 사도들이 싸워 온 결과이다.
사실, 오늘날에는 돼지고기는 더 이상 부정한 음식이 아니다. (심지어 필자가 어렸을 때는 개고기를 즐기시는 목사님들도 많았다.) 음주 문제도 이와 비슷하지 않겠는가. 예수님도 마셨던 술을, 왜 부정하게 취급하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율법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당신이 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켜서 돼지 고기를 멀리하며, 비늘 있는 생선만 먹겠다면 말리지 않겠다. 말리기는 커녕,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칭송하겠다. 하지만, 내게 강요하지는 말라. 나는 삼겹살, 육회, 뭉티기, 선지국을 좋아한다. 당신이 금주를 하기로 했다면 그 또한 잘한 일이다. 하지만, 술 마시는 성도를 비난하지는 말자.
현대인들은 팩에 담긴 고기를 종류별, 부위별, 상태별로 쉽게 살 수 있다. 대신, 이 짐승이 어떻게 자랐고 어떻게 도축되어 어떤 과정으로 유통되었는지 알 수 없다. 이렇게 소비와 생산이 분리된 시대일수록 생명의 무게에 대해 무감각해지며 소비 행위에 책임 의식과 감사하는 마음이 희박해진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고기를 먹고 싶을 때마다 자기가 기르던 가축과 눈을 맞추며 성막까지 끌고 가야 했고, 제사장 앞에서 그 목에 직접 칼을 대어 피를 빼야 했다. 이를 통해 "내가 고기를 먹기 위해 한 생명(피)이 희생되었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자신이 사냥한 사슴에 대해 ‘너의 힘과 용기에 찬사를 보낸다’며 인사했다던 인디언들처럼은 아니더라도, 우리가 소비하는 물건들에 대한 희생과 감사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1인 가구가 늘어가고, 혼밥과 혼술을 즐기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완전히 개인화된 세상에서 너무 나이브한 소리인지는 모르겠다. 가나안 성도로서 심히 부끄러움을 느끼는 부분이긴 하지만, 성경이 추구하는 방향은 공동체 중심으로 모이는 신앙임이 분명하다. 회막(공동체) 중심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 그런데, 내가 속할 공동체를 찾아 나서는 것이 쉽지는 않다는 핑계로 너무 오래 뭉개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해지긴 하다.
아울러, 우리의 삶 전체가 예배가 되어야 하며 예수 안에서 자유하되 그 자유를 사랑과 책임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원칙도 지키고 있지 못해서 못내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