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 입성을 완수하지 못한 비운의 지도자
모세가 죽었다. 그것도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에 말이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 가나안 땅을 내려다보며 모세는 숨을 거둔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로 대표적인 이유로 므리바 샘물 사건을 든다. 므리바에서 물을 낼 때 ‘바위에 대고 물을 내어라고 말하라’ 하신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바위를 두 번 내려쳤다는 사건 말이다. 뭐, 민수기에 ‘너희가 나를 믿지 않고 백성 앞에서 나를 거룩히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너희는 그 땅으로 백성을 인도하지 못할 것’(민수기 20장 12절)이라고 직접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 이유가 틀렸다고는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이 말씀을 처음 읽었던 고등학생 시절부터 하나님을 매우 옹졸하고 즉흥적인 캐릭터로 그린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만약 자녀에게 무언가를 시켰는데 아이가 짜증을 내면서 무언가를 집어던졌다면 - 무척 섭섭하고 속이 상하고 화가 날수는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자녀에게 돌아갈 유산을 빼앗아간다던가 하진 않을 것 같다. 모세에게 가나안 땅이 어떤 의미인지 아실 분이 - 한 번의 실수로 일생의 희망을 빼앗아 간다니 너무 가혹한 조치가 아닌가.
사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충분히 활동할 수 있을만큼 신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한 상태였다. 비스가 산 꼭대기에서 길르앗에서 단까지를 바라볼 수 있을(신명기 34:1)만큼 눈도 밝았고 기력도 약해지지 않았다.(신명기 34:7) 하지만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 땅을 보여주기는 하시지만 그 땅에 들어가도록 허락하지는 않으신다.(신명기 34:4)
나는 오늘 비스가 산 위에 모세와 나란히 서보는 마음으로 선다.
모형신학적인 관점에서는 - 모세는 ‘원래’ 여기까지였다고 이야기한다. 출애굽을 회심, 가나안을 향한 여정을 ‘천로역정’식의 구원을 향한 여정으로, 가나안을 천국으로 환원시켜 볼 수 있듯이 모세는 율법을 상징하는 인물이라 말할 수 있다.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 수 없다는 것은 율법은 천국으로 인도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가나안, 즉 천국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은 누구인가? 바로 여호수아, 즉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이 해석을 보고는 성경이 가진 다층적인 구조에 탄복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신화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잘 짜여진 각본 같아 오히려 현장감이 떨어진다. 이런 시나리오 대로라면 므리바 물가에서의 모세의 반응이 어떠하건, 가나안에 데려가지 않는다는 결론은 미리 정해져 있지 않은가. 모세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을 이용해 먹은 것이라 억하 심정을 가질 수도 있지 않을까. 험악한 광야에서 함량미달인 백성에게 실컷 시달리고 난 후에 끝이 보이자 모세에게 “이젠 죽으라”는 것도 억울한데 자기의 운명이 처음부터 가나안 입구까지라고 정해져 있었다면 얼마나 더 억울할까. 인생의 길은 예정되어 있다는 예정론 또한 잘못 해석하면 이런 운명론 내지 허무주의로 귀결되고 만다.
모세의 무덤은 어디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주검이 발견되지 않거나 무덤이 어디인지 밝혀지지 않은 사람들은 민중들의 기억 속에 불멸의 존재로 살아있기도 하다. 일본 전국시대의 패자가 될 뻔(!)했던 오다 노부나가는 혼노지의 변으로 목숨을 잃었지만 그 자신이 저지른 방화로 인해 그의 시신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오다 노부나가는 일본인들의 민담 속에 아직까지 살아있고, 아직도 배신자 미츠히데를 쫓고 있다는 드라마가 나오기도 한다.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정벌했던 칭기스칸은 자신의 장례 행렬에서 만나는 모든 생물을 가리지 않고 죽여 없앴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무덤 주위에 나무를 심어 아예 숲으로 만들어버렸다고 한다. 굳이 그렇게까지 했던 이유는 - 도굴을 막고 자신의 영면을 방해받지 않겠다, 자신이 흘린 수많은 피에 대한 보복을 피하겠다는 의중도 있었겠지만 후대 사람들에게 ‘불멸의 아이콘’으로 남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는 모세 또한 죽지 않고 살았다는 이야기가 돌았을 것이다.
하지만, 모세의 무덤을 숨기신 이유는 모세를 불멸의 존재로 그리기 위함이 아니다. 정반대의 방향에서 이야기하고 싶다. 사람들은 영웅이 죽으면 그를 신격화한다. 만약 모세의 무덤이 가나안 땅에 있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대신 모세의 무덤을 찾아가 절을 하고, 그 뼈를 부적처럼 여겼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나중에 히스기야 시대에 모세가 만든 놋뱀을 우상으로 섬기다 부수기도 하지 않았던가.
하나님은 모세가 '신'이 되는 것을 막고, 철저히 '종'으로 남게 하기 위해 그의 시신을 감춘 것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징계가 아니라, 그를 우상 숭배의 오명에서 지켜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였을 수도 있다.
가데스바네아에서 불신앙의 보고를 듣고 마음이 흔들린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그러니 그들에게 말하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내가 너희에게 들은 그대로 너희에게 해 줄 것이다. 내게 불평을 한 너희들 가운데 20세 이상의 모든 등록된 사람은 하나도 빠짐없이 이 광야에서 시체가 되어 쓰러지게 될 것이다.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빼고는 너희 가운데 그 누구도 내가 너희에게 주어 살게 하겠다고 맹세한 그 땅으로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민14:29-30, 우리말성경]
이것은 이스라엘에 내린 재앙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반대쪽으로는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이야기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여호수아라는 지도자에 주목한다.
미디안과의 전쟁은 여호수아의 인지도를 높이는 계기가 된다. 전쟁의 승패는 언덕 위에서 손을 들고 있던 모세의 기도로 결정이 된다고는 하지만, 실제 피흘리며 싸웠던 군대의 지휘관은 여호수아였다. 이 사건으로 여호수아는 전 이스라엘의 영웅이 된다. 또한 가데스바네아에서 갈렙과 함께 믿음의 보고를 한 덕에 모세의 전적인 신임을 받았을 것이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은 모세와 그와 함께 한 세대는 가고 여호수아와 그의 세대가 시작될 것이라는 선포와 같은 말씀이다.
그렇게 모세는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의 무덤조차 남지 않았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이것은 '토사구팽'이나 '실패한 말년'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충성된 종을 결코 '행방불명' 상태로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모세의 이름을 '가나안의 땅문서'에서 지우신 대신, '천국의 생명책' 가장 윗줄에 옮겨 적으셨다. 땅에서의 상실은 하늘에서의 완성으로 이어진다. 성경은 모세의 이야기가 느보산의 쓸쓸한 죽음으로 끝맺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세의 길 끝에는 ‘못 들어간 땅’이 아니라, ‘하늘에서 맞아 주시는 하나님’이 있었다. 백성 앞에서는 지도자였고, 하나님 앞에서는 종이었던 모세. 광야를 걸으며 자신의 분노, 외로움, 후회, 신념, 순종을 함께 짊어졌던 이 한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사람’으로 기억된다.
그가 성경에서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장소는 느보산이 아니라 변화산이었다. 땅을 밟지는 못했지만, 하늘에서 예수와 나란히 섰다. 가나안이라는 지리적 경계 너머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라는 더 큰 약속이 있었고, 하나님은 모세를 그 자리로 부르신 것이다.
모세의 삶은 우리에게 한 가지를 분명히 가르쳐준다. 성공이 끝이 아니고, 실패도 끝이 아니라는 것. 하나님께 붙들린 사람의 인생은, 땅이 아니라 하늘에서 완성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