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가나안 성도의 성서 방랑기

가나안 성도의 묵상 노트

by 이진석

나는 가나안 성도

나는 가나안 성도이다. 하지만 엄밀하게는 가나안 성도는 아니다. 다들 알다시피 가나안 성도는 교회에 ‘안나가’는 성도를 뜻하는 신조어인데 나는 집 근처 대형 교회에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년째 등록도 하지 않고 일주일에 한 번 예배만 드린다. 그래서 나는 교회에는 나가지만 스스로를 가나안 성도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현대 기독교가 이렇게 흥왕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교회이다. 교회라는 공동체가 없었다면 기독교는 진즉에 소멸했을 것이다. 개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개인이 교회 공동체에 속해 있지 않으면서 그 신앙을 유지하기란 거의 힘이 든다. 그래서 지금, 나의 신앙도 거의 빈사 상태이다.


내가 교회에 정착하지 못한 이유

교회에 대한 환멸은 아니다

내가 교회에 정착하지 못한 특별한 이유는 없다. 다른 사람들처럼 교회의 부정적인 행태에 대해 환멸을 느낀 것은 아니다. 학생회 생활도 했고 청년부 회장도 하고 아동부 교사도 했었지만, 교회의 중직을 맡아 교회의 생리를 알기 전에 모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기성 교회에 대한 불만(?) 같은 것도 느낄 새도 없었다. 그냥, 소문으로만 듣고 여러 매체로만 듣는 정도. 그래서 내가 직접 경험하지 못한 내용에 대한 비판은 감히 하지 못한다.

하나님에 대한 회의 때문도 아니다

딸아이가 세상을 먼저 떠나고 아들 녀석이 아픈 몸으로 태어나면서 하루에도 수십 번 하나님의 공정과 사랑에 대해 회의했다. 하나님은 선하고 전능하신 분인데 나에게 왜 이런 고통과 아픔이 있어야 하는가라는 모순 앞에서 지금도 고민하고 있지만 -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질문해도 대답하지 않는 그의 침묵 앞에 나 또한 차츰 입을 다물기 시작했다. 사랑이 식어 가며 대화를 하지 않게 되는 중년 부부들처럼, 하나님과 나의 사이도 ‘예의만 차리고 있는 사이’에 가깝다. 사랑이 없는 부부도 엄연한 부부인 것처럼, 신에 대한 열렬한 믿음과 헌신이 없는 신앙인에게 ‘배교했다’는 표현은 좀 과하지 않은가.

피곤해서 그렇다

내가 교회에 정착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를 들자면, ‘피곤해서’ 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이전에도 몇 차례 교회를 옮겼었는데 교회에 등록하고 새가족 교육받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하는 과정이 무척 피곤하게 느끼는 자신을 발견했다.

우리 가정이 넘어와야 했던 질곡들을 또 처음부터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는 것이 부질없는 신세한탄처럼 느껴졌고 특히, 규모가 작은 교회에서는 목회자와 더 개인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하다. 그래서, 새로운 교회에 등록해서 교적을 둔다고 해도 나는 또 광야로 뛰쳐나갈 가능성이 크다.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한 채 돌아다니는 것이, 역마살이 낀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광야를 돌아다니다 생을 마친 출애굽 1세대들과 같이 나 또한 평생을 가나안 성도로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무척 외롭고 두려운 일이다.


가나안 성도도 성경을 읽는다

교회에도 정착하지 못했지만 나는 신앙을 버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성경도 읽는다. 그리고 성경은 진리라고 생각한다.

물론, 성경의 모든 내용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문자 주의자’는 아니다. 오히려, 문자적 해석을 조심스럽게 비판하는 쪽이다. 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해 보지는 않아서 스스로의 입장을 규정하기에는 조심스럽지만 - 역사적이고 현실적인 해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에는 주석이나 성경 지도, 파노라마 같은 자료를 함께 펼쳐놓고 인터넷도 검색하면서 읽는다. 한 인물에 대해 묵상할 때는 심리학 책을 뒤져보기도 한다.

성경은 인간사의 파노라마

내가 성경을 읽는 이유는 - 우선은 재미있어서이다. 성경 안에 기록된 많은 사람들의 행적과 심리를 따라가다 보면, 무릎을 치게 되는 순간이 있다. ‘이 사람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하나님은 왜 그렇게 행하셨는지’ 이해되는 지점이 있다. 그리고 수천 년의 시간과 수천 km의 공간을 넘어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도 그 마음이 전해진다. TV를 잘 보지 않는 나에게는 드라마보다 더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분명, 하나님에 대한 - 그의 신성과 역사(役事)의 역사(歷史)에 대한 기록이건만, 희로애락애증유가 모두 담긴 인간사의 파노라마처럼 보인다. 본문에 따라 다르지만 - 어느 드라마보다 더 재미있는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이다. 여백이 많은 곳은 조사와 추론과 상상으로 채워가는 과정은 지적인 유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성경은 교훈과 지혜의 보고

그런가 하면, 성경은 고전으로서의 가치도 상당하다. 인류 최고의 베스트셀러 운운하는 말은 부질없는 말이라 생각하지만, (많이 팔리는 책과 많이 읽히는 책은 다른 것이니) 그럼에도 성경 속에는 하나님의 지혜 이전, 수천 년 동안 쌓아온 인류의 지혜가 담겨 있다. 그래서 불신자이거나 나아가 기독교에 대해 좋지 않은 인상을 갖고 있는 사람도 읽어보아야 할 책이 아닐까.

나는 책을 읽으며 꼭 기억할만한 구절, 다음에 써먹을(?) 구절을 밑줄을 그어 두는데 소설은 한 질을 읽어도 밑줄 그어둔 곳이 몇 군데 없다. 그에 비해 동양 고전이나 서양 사상가들의 책에는 밑줄 그어둘 곳이 너무 많다. 하지만 이것을 삶에서 적용하기 위해서는 또다시 맥락이 필요하다. 내 삶으로 직접 겪기 전까지는 그 구절은 내 독서 카드 속에서만 잠자고 있을 것이다. 책의 정수를 읽고 외우는 것과 그 정수를 다시 삶 가운데 경험하고 체화하는 것은 압축 - 풀기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할까.

하지만 성경은 이 모든 것(역사, 예언, 시가, 편지 등 다양한 장르)이 한꺼번에, 그리고 유기적으로 일어나는 책이다. 역사서에서는 인물의 심리와 의도, 그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읽힌다. 시편에서는 주로 시인의 감정이 읽힌다. 서신서에서는 복음의 논리가 단단한 원석처럼 박혀있다. 그래서 어느 편에서는 압축된 교훈을 주기도 하고 또 어느 편에서는 상황과 맥락으로 나의 모습을 반영해서 나를 직격 하기도 한다.

성경 읽기는 가치 전복적인 행위이다

성경을 읽어야 하는 마지막 이유는, 이 사회의 잘못된 가치를 전복시킬 수 있는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장동석 작가는 ‘금서의 재탄생’에서 ‘성서는 읽을 뿐 아니라 삶으로 살아내야 하지만 오늘 한국 교회는 눈으로만 성서를 읽고 있다.’고 고발하며 ‘성도가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성서를 읽었다면 기독교가 ‘공공의 적’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며 개탄한다.

만약, 우리나라 모든 성도들이 50년 만에 한 번씩 희년을 선포했다면 가난의 대물림은 계속되었을까. 정치인들이 높아지려고 하기 전에 낮은 자가 되라는 말씀을 실천했다면 정치가 이 모양이겠는가. 우리 사회가 ‘승자 독식의 레이스(?)’에서 패배한 베데스다 병자에게 치유를 선포했다면 이렇게 치열한 경쟁 사회가 되었겠는가.

초대교회 성도들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사람들’이라는 평을 들은 것은, 단순히 ‘훌륭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다. 성경대로 산다는 것은 - 당시의 사회와 경제, 신분제, 나아가 정치 제도까지 뒤흔들어 놓는 ‘전복적인’ 삶의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성경 읽기를 통해, ‘길들여진 기독교’가 아니라 살아있는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한다. 그래서 나도 복음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복음대로 살아내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복음에 대해 깊이 읽으며 텍스트가 나를 읽게(나의 위선과 욕망을 폭로하게) 해야 한다.

물론, 내가 대단한 혁명가나 순수한 실천가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예수님도 하나님 나라를 ‘제국’이라 하지 않고 ‘겨자씨’, ‘누룩’에 비유했다. 거대한 악을 뒤집으려다 변질되는 것보다 내가 서 있는 교실과 가정, 내가 맺는 모든 관계 속에서 성경적 원리를 실천하며 작은 균열을 내는 것이 진정한 ‘전복’이 될 것이다.

나의 신앙 방랑기

이 글은 성경 속에서 헤매던 신앙 방랑기(放浪記)이기도 하고, 나의 묵상집이기도 하다. 성경을 읽으며 의문을 갖고 답을 찾기 위해 고민한 -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기록이기에 다른 이에게 공개하는 것도 조심스럽다.

본격적인 신학 과정을 거치지 않은 평신도의 기록이기에 다소 무리한 해석이나 적용이 있을 수 있음을 미리 밝힌다. 이 글은 신학적 논쟁을 위한 것이 아니며, 그저 '아,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구나' 하는 정도로 너그러이 보아주면 좋겠다. (시쳇말로, '반박 시 당신의 말이 다 옳다')


방랑의 끝에 그가 계시길

누군가 그랬다. 성경 속에서 하나님을 찾지 못하면 헛일이라고.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말 앞에 쫄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대단한 강단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서둘러 하나님을 허겁지겁 찾지는 않을 거란 말이다. 또는, 만난 척, 은혜받은 척은 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묵묵히 성경을 묵상하며 성경 속에 말씀하시는 그의 음성을 직접 들을 것이다.

욥의 고백처럼 “이전에는 내가 하나님에 대해 듣기만 하였는데, 이제야 내가 하나님을 뵙습니다.’”라고 직접 말할 수 있기를. 이 길 끝에 하나님이 계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