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우주의 나이

창세기 1장을 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by 이진석

사람들이 성경을 펴자마자 만나는 첫 구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그냥 첫머리부터 아주 믿음과 불신의 시금석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믿음을 향한 여정의 출발지이면서 동시에 종착지와 같은 선언이다. 이 선언을 넘어가야 믿음의 여정을 시작하는 것이고 믿음에 이르는 날, 이 선언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분명, 걸려 넘어지라고 주신 말씀은 아닐 텐데 이 한 구절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교회에서 발길을 돌린 사람이 얼마나 많겠는가. 반대로 그런 예비 신자들의 합리성을 무시하며 과학계와 싸우려 하는 성도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창조 기사는 과학과 싸우라거나, 과학적으로 설명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다. 과학 서적이 아니라, 문학이나 역사에 가깝다. 당시 사람들에게 신의 존재는 공기와 같아서, 성경은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하지 않고 그분이 누구인지 '선포'하는 데 집중했다. 그래서 창세기사는 논증과 설명으로 되어 있지 않고 함축과 상징, 그리고 선언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럼에도, 창세기가 저술될 당시의 과학 수준을 생각하면 오히려, 다른 종교의 신화들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과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예를 들면, 다른 문명권의 신화화에서는 해와 달은 그 자체가 절대적인 신이었지만, 창세기는 이것들을 하나님이 만드신 조명 기구로 선언해 버린다. 그래서 문자적으로 틀렸다는 이유로 성경 전체를 비과학적이고 반지성적인 신화로 매도하는 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격이다.

물론, 성경 말씀 이외의 모든 이론이나 설명을 ‘불신앙’으로 매도하는 근본주의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지성을 억압하려고 하는 것은 신의 뜻이라기보다 자기 보호적인 폭력성에 가깝다.

진실은 양자택일에 있지 않다. 과학은 현상을 설명하여 하나님의 솜씨를 드러내고, 성경은 의미를 해석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낸다. 우리는 두 날개로 날아야 한다. 과학은 '어떻게(How)' 생성되었는지를 묻고, 성경은 '누가(Who)', '왜(Why)' 만들었는지를 묻는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경 속에서 과학 원리를 찾지 말고 세상과 사람의 창조에 담긴 의미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과학에 문외한인 입장에서 실증적으로 성경의 기록이 사실임을 변호하지 못한다. 신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어서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한다고 자신할 수도 없다. 그저 관습적으로 읽어오던 잘못된 사실을 중심으로 창세기에 담긴 원리와 오늘을 살아가는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고자 한다.


창세기의 주요 내용은 ‘천지 창조’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창세기를 두고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는 책이라고 착각한다. 내용을 넓게 보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닌데, 창세기의 중심 내용은 우주의 기원이 아니다. 일월성신의 탄생을 잠깐 언급하지만 지구에게 주어진 ‘환경’으로 그리는 정도이다. 이런 파편적인 사실을 갖고 천체 물리학자들과 논쟁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성경의 관심은 우주와 지구의 생성 방법이 아니라, 지구의 생물, 특히 사람, 그중에서도 이스라엘 민족의 발생과 하나님 당신과의 관계에 집중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The earth was formless and empty, and darkness covered the deep waters. And the Spirit of God was hovering over the surface of the waters.


이 구절대로라면 지구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상태여야 한다. 그러니까 창세기 1장 1절은 완벽한 ‘無’의 상태가 아니라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 속에 있는 지구의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지표면의 상태는 지질학자들이 말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많은 소행성들의 충돌과 지각 변동으로 인해 지표면이 내 피부와 비슷한 상태였다고 하던데 성경이 말하는 혼돈과 공허, 흑암과 비슷한 상태로 보인다. 이 말씀대로라면 원래 있던 혼돈의 지구에 질서를 부여하셨다고 하는 편이 더 옳지 않은가.


태양은 넷째 날 창조되는데, ‘날(Day)’이 어떻게 존재하는가?

가장 먼저 창조한 것은 빛이다.

Then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God saw that the light was good.


화가는 ‘빛’을 그리기 위해 ‘어둠’을 그린다. 순수한 빛은 물감으로 그려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흰색과 검은색은 채도가 없고 “밝기”만 있다. 어느 정도로 밝냐에 따라 흰색이 되기도 하고 회색, 검은색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빛은 ‘분리’하는 기준이자, 도구가 된다.

Then he separated the light from the darkness. God called the light “day” and the darkness “night.” 빛이 비치면 낮이고 비추지 않으면 밤이 된다. 결국, 빛을 창조한 것은 시간을 창조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빛은 해와 달을 의미하지 않는다. 해와 달은 넷째 날에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라며 시간의 단위를 이야기하고 있다.

정리하자면 첫째 날의 빛이 단순한 '광원(Lamp)'이 아니라, 혼돈(카오스) 속에 “시간의 흐름과 질서(낮과 밤의 리듬)”를 부여하는 존재였음을 암시한다. 즉, 빛이 생김으로써 '변화'를 인지할 수 있게 되었고, 비로소 '시간'이 카운트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님이 처음에 "빛이 있으라" 하신 것은 단순히 "어두우니까 불을 켜자"는 의미를 넘어선 것 같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시간 안에서 세상을 만든 게 아니라, 세상을 만들면서 시간도 같이 만드셨다" 첫째 날 - 빛의 창조는 곧 시간의 창조이다.


세상은 6일 만에 창조되었을까?

성경 원어를 보더라도 다양한 해석은 충분히 가능하다. 창세기에 쓰인 '날'이라는 히브리어 단어 '욤(Yom)'은 매우 다양한 뜻을 가진다. 문자주의자들의 주장대로, 해가 떠 있는 낮 시간 (Daylight)이나 24시간의 하루 (24-hour day)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막연한 긴 기간, 시대 (Era, Epoch)를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말에도 ‘오늘날’은 단순히 오늘이 아니라, ‘현대’라는 시간을 가리키는 말이지 않는가. 따라서 성경의 "6일"은 24시간 X 6번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6번의 긴 기간(시대)'으로 해석하는 것이 신학적으로 전혀 어색하지 않다.

현대 물리학의 상대성 이론에서는 시간은 관찰자에 따라 다르다고 하지 않은가. 시간은 우주 어디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흐른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관점(우주 전체의 시계)에서는 우주가 시작된 시점의 에너지 밀도와 중력장 내에서 흐르는 시간으로는 '6일'이 맞을 수 있지만 지구의 관점 (우리의 시계)에서 그 시간을 되돌아보면, 그 '6일'은 150억 년'이라는 긴 시간으로 늘어지게 보인다는 것이다.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 3:8)는 말씀은 단순히 문학적인 표현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해 계신(혹은 시간의 축을 자유롭게 다루시는) 하나님의 속성과 시간의 상대성을 꿰뚫는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분리하면 공간이 창조된다

God said “Let there be a space between the waters, to separate the waters of the heavens from the waters of the earth.” God made this space to separate the waters of the earth from the waters of the heavens. God called the space “sky”

하나님은 하늘을 창조하시지 않았다. 그보다는 창공 위의 물과 창공 아래의 물로 나뉘었을 뿐이다. 개역개정에서는 창공(蒼空)- 비어있는 푸른 공간 - 이라고 번역한다.

과학에서 '하늘'에 가장 가까운 용어는 ‘대기권’인데 지표면에서부터 고도 80~100km의 높이까지의 공간으로 규정한다. 하나님이 창조한 ‘창공-하늘’은 곧 하늘의 바닥과 하늘의 천장을 뜻한다. 하나님은 손으로 하늘을 직접 빚어 만드신 것이 아니다. 우주의 거친 방사능과 진공 상태로부터, 지구라는 안전지대를 확보하기 위해 대기권이라는 지붕과 지표면이라는 바닥을 설치한 것이다. 모든 생물이 살아가는 ‘공간 space’을 만들어 내신 것이다.

땅과 바다 또한 마찬가지이다. 해저 지형이나 육지나 물을 빼고 보면 다 같은 '지각(Crust)'이다. 하나님이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고 하신 것은, 없던 땅을 뿅 하고 만드신 게 아니라, 물로 뒤덮인 세상에 경계선(해안선)을 그어 육지라는 삶의 무대를 노출시킨 것.

건축가는 참 아이러니한 직업이다. ‘집’을 만드는 직업이지만, 사실 그들이 만드는 것은 ‘집’이라는 공간이 아니라, ‘벽’이다. 건축가가 벽을 쌓음으로써 ‘공간’을 만드는 것처럼 하나님은 경계를 세워 분리함으로써 하늘과 땅, 바다라는 공간을 만드신 것이다. 그래서, 분리는 차별이 아니라 창조와 질서를 부여하기 위한 과정이었던 것이다.


공간에 창조물들이 입주하다

만들어진 공간 속에 창조물들이 입주할 시간이 되었다. 하늘에 태양이 있어 낮과 밤을 나눈다. 태양이 생김으로써 지금의 낮과 밤이 생긴 것이다. 다만, 지구의 자전 속도가 지금과 달랐다고만 생각해도 ‘하루’라는 시간이 24시간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그리고 달도 생겨서 밤에 비추게 된다. 달이 지구를 “위해” 창조된 것은 아닐 것이다. 지구가 뭉쳐지고 남은 조각들이 지구의 인력 때문에 벗어나지 못하고 지구 주위를 돌게 된 것이겠지. 그렇다고 해서 성경의 기술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운명의 상대를 만났을 때 “I was born to love you” 라고 고백하는 것을 ‘유의미론자’라고 탓할 수는 없다.

그런가 하면, 바다에는 바다 생물이, 하늘에는 새가, 육지에는 육상 생물이 자라기 시작했다. 이 순서는 진화론에서 말하는 생물의 발생 순서와 유사하다. 땅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자 식물이 자라기 시작했다. 진화론자들 또한, 바다의 조류들이 발생시킨 산소가 물 위로 올라가 대기 중의 산소와 질소, 이산화탄소가 많아지자 땅 위에서 광합성을 하는 식물들이 자라기 시작했을 거라 추측한다. 그리고 광합성으로 발생한 산소로 호흡하는 육상동물이 출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창조와 진화는 그 과정이나 순서는 유사하다. 주체의 문제일지언정 적어도 순서의 문제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성경이 씌여진 당대의 고대인들에게 지질학이나 고생물학에 대한 지식이 있었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모세로부터 다윈에 이르기까지 세계와 인간의 기원에 대한 공통된 기억이 우리 안에 작동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세상은 인간을 위해 준비된 것?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한다고 했던가. 만들어진 환경 속으로 인간이 창조된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그 창조의 과정이 모두 인간을 위해 이루어진 것처럼 여겼다. 마치, 어항을 사서 물을 채우고 수초를 심는 것은 물고기를 기르기 위함인 것처럼. 인간만을 위해서 이 세상이 창조된 것처럼 생각해 온 것 같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는 것 외에 인간을 위해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내용이 없다. 사람을 창조하기 전에도 세상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며 그 자체로도 충분한 완성이었다.

이것은 성경을 기록한 주체가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의 고백을 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온 세상이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천지 창조의 지극히 작은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도, 실망하지 마시라. 과학은 우리가 유전자의 그릇에 불과하다고 하는데, 성경은 그래도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창조물이라고 말하지 않은가. 그것은 인간이 가치 있는 존재이며 인생은 살만한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