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선악과 절도 사건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두어서 아담이 죄에 빠지게 하셨을까?

by 이진석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범죄는 ‘선악과 사건’이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어서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사건 말이다. 이 사건이야말로, 많은 불신자들의 불만 내지 반항심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다. 그깟, 열매 하나를 먹었다고 해서 에덴에서 쫓아내는 것이 정당한 처벌이냐는 것이다. 그렇게 귀한 열매였다면, 안 보이는 곳에 꽁꽁 숨겨두고 혼자 드실 일이지 ‘하필’, 선악과를 동산 중앙에 두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드느냐는 말이다.


금단의 열매를 추구하는 사람들

서유기의 손오공은 옥황상제의 반도원(과수원)지기로 임명되었는데, 3천 년, 6천 년, 9천 년에 한 번 열린다는 불로장생의 복숭아를 몽땅 따 먹어버렸다. 심지어 태상노군의 선단까지 훔쳐 먹었다. 그 결과, 손오공은 불로불사의 몸이 되었지만, 천계의 군대와 전쟁을 벌이고 결국 부처님의 손바닥 안에서 제압당해 오행산 아래 500년 동안 갇히는 형벌을 받는다.

그리스 로마신화의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가 인간에게 금지한 ‘불’을 훔쳐 인간에게 전해주었다. 선악과가 ‘지혜/판단력’이라면, 불은 ‘문명/기술’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 결과, 코카서스 바위에 묶여 매일 독수리에게 간을 쪼여 먹히는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페르세포네는 지하 세계의 왕 하데스에게 납치되었을 때, 지하의 음식인 ‘석류’를 먹은 일이 있었다. 페르세포네가 실수나 함정에 빠졌음에도 석류 알갱이를 먹은 개수만큼(보통 4~6개) 일 년의 절반은 지하 세계(겨울)에 머물러야 하는 운명이 결정된 것과 달리, 아담은 명확한 금지 명령을 알면서도 능동적으로 선택했다는 점에서 죄의 무게가 다르다.

신화와 문학 속에는 이렇게 ‘금지된 것’에 손을 대어 낙원에서 추방되거나 형벌을 받는 ‘위반자(Transgressor)’들이 꽤 많다. 이들을 아담과 비교해 보면 ‘죄의 본질’이 더 입체적으로 보인다.


왜 선악과를 따 먹었을까?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훔쳐온 이유는 인류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제우스의 독재에 대한 저항 때문이었다. 손오공이 천도복숭아를 훔친 이유는 식욕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의 원래 캐릭터답게 약간은 장난, 그리고 체제에 대한 반항심 때문이었다. 그에 비해,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은, 단순히 배가 고파서도 아니었고 다른 존재를 위한 이타심 때문도 아니었다. ‘하나님처럼 되기를 원한’ 인류의 반란이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영원히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형벌을 받았지만 사람들에게 영원한 영웅으로 기억된다. 손오공은 수천 년의 징역형 후에 갱생의 기회를 얻는다. 하지만 아담은 에덴에서 추방되어 땀흘려 일해야만 살 수 있는 곳으로 이주한다. 그리고 에덴으로 돌아가는 길은 천사들의 케루빔으로 막혀 버리고 만다. 세상 군주에게 가장 용서 받을 수 없는 범죄는 ‘반역죄’이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도 ‘다른 모든 죄는 용서받을 수 있으나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하셨지 않은가.


선악과의 의미

선악과는 '하나님과 인간의 경계(Boundary)'를 상징한다. 에덴동산의 모든 것은 아담 마음대로 할 수 있었지만, 딱 하나 이 나무만은 금지되었다. 이것은 "네가 이 동산의 왕처럼 보이지만, 진짜 주인(왕)은 나(하나님)다"라는 사실을 매순간 상기시키는 장치였다. 칼뱅을 비롯한 많은 신학자는 이를 '성례(Sacrament)'로 본다. 마치 성찬식의 빵과 포도주가 단순한 밀가루와 음료 이상이듯, 선악과라는 과실은 "하나님께 순종할 때 생명을 누린다"는 계약의 상징물인 것.

그래서 과일을 먹은 행위는 맛있는 것을 훔쳐 먹은 잡범 수준의 죄가 아니라, "나는 더 이상 당신의 피조물로 남지 않겠다"는 독립 선언(반역)이었다는 것이 문제다.

여기서 '선악을 안다(Knowing Good and Evil)'는 것은 단순히 지적으로 멍청하다가 똑똑해진다는 뜻이 아니다. 히브리어적 사고에서 '안다'는 것은 경험하고 판단하고 결정한다는 뜻을 내포한다. 먹기 전에는 무엇이 선(Good)이고 무엇이 악(Evil)인지의 기준은 하나님께 있었다. 하나님이 "이것은 좋다(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시면 좋은 것이고, "나쁘다" 하시면 나쁜 것이지만, 인간이 그 기준을 가로챘다. 이제부터는 "내 기분에 좋으면 선, 내 기분에 나쁘면 악"이 되어버린 상황이 되었다. 다시 말해,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은 '도덕적 판단의 주체(Supreme Judge)'가 나 자신이 되겠다는 선언이다. 이것을 '도덕적 자율성(Moral Autonomy)'의 획득이라고도 부르는데, 피조물인 인간에게는 이것이 곧 타락이다.

정리하자면,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동산 중앙에 두신 것이 문제가 아니다. 그것을 비밀의 공간에 두셨다해도, 인간은 하나님과 같이 되기 위해 나무의 실과를 찾았을 것이다. 그리고 ‘선악과를 따 먹는 행위’를 ‘인간이 선악의 기준을 가져가는 교만과 반역’의 상징으로 읽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선악과는 실낙원 이후에도 늘 존재했고, 에덴이 아닌 곳에서도 위협받고 있다.


선악과를 따 먹은 결과

인간이 죄를 짓자마자 가장 먼저 한 행동은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아내)과의 관계를 끊어내는 것이었다. 죄는 한 사람의 영혼 뿐 아니라, 그 사람이 맺고 있는 관계를 파괴시킨다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본다.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여자가 그 열매를 줘서 먹었습니다.”(창3:12) 라는 표현은, 단순히 책임을 피하는 것을 넘어 ‘수동적인 공격성(Passive Aggression)’으로도 볼 수 있다.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절대자에게 "원인 제공자는 당신"이라며 우회적으로 반격을 가하는 셈이니까. 동산에 나무를 두신 것은 당신의 잘못입니다. 당신이 내게 아내를 주신 것이 잘못입니다. 당신이 뱀을 창조하신 것도 잘못입니다. 결국, 내가 이렇게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모두 당신 탓입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듣던 화법이지 않은가. 성범죄자가 피해자의 옷차림을 탓하거나, 횡령범이 회사의 허술한 감시 시스템을 탓하는 것과 같은 비겁한 논리이지 않은가.

그런 책임 전가의 결과는 무엇인가? 문제의 해결은 커녕, 자신을 무너뜨리고 문제를 악화시키며 모든 관계를 파괴시킨다. ‘너 때문에 낙원에서 쫓겨났다’는 원망을 평생 들어야 하는 하와와 아담의 관계는 어떠하겠는가. 소산을 풍부히 내어주던 땅은 땀을 흘려야 먹고 살만큼 내어주게 된다. 그나마도 가인이 동생을 죽이고나서는 땅을 갈아도 그 효력을 제대로 주지 않게 된다.

많은 사람이 아쉬워하고 원망하는대로 아담의 범죄로 인해 우리는 낙원을 잃었다. 하지만, 범죄한 아담을 비난하고 아담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하나님 때문에 이렇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는 아담과 똑같이 행동하고 있을 뿐이다.


인류의 역사는 악의 연대기

며칠 동안 창세기 앞부분을 묵상하다 보니, 일정한 경향이 눈에 띄었다. 아담 - 가인 - 라멕 - 노아시대의 사람들 - 바벨탑까지 죄가 확산되고 심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옛이야기처럼 읽던 창세기의 앞부분은 사실, 죄가 태어나고 자라던 악의 연대기였던 것이다.

아담의 죄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는 내면의 죄였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것이 시작이었다. 내 기분에 나쁘면 악이라 규정한 아담의 선악과는, 가인에게서 살인이라는 열매로 나타났다. 거기에 라멕은 살인을 정당화하고 합리화 하며 심지어 자랑하기에 이른다. 죄에 대한 수치심이 사라진 상태이다. 이는, 폭력을 정당화하며 보복을 일상화 하는 모습을 상징한다. 시쳇말로, ‘사이다 참교육’이 문화이자, 자랑거리가 되는 시대를 말한다. 노아의 시대에 이르러는 법과 질서가 무너지고 힘이 지배하는 아노미 상태에 빠진다. 하나님께서 노아의 홍수로 한 번 정화하긴 하지만, 악의 증식은 가속도가 붙어, 국가 권력과 기술 문명을 이용하여 조직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바벨탑을 쌓게 된다.

죄를 두고 나누는 대화의 양상도 다르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너 어디 있냐? Who are you?’라고 물으셨다. 아담은 ‘당신을 피해서 내가 숨었다’고 이실직고 하지만 ‘당신이 제게 주신 여자가 꾀었습니다’며 책임을 전가했다. 하나님은 아벨에게 ‘네 동생 어디있냐? Where is he?’라고 물으신다. 가인은 동생을 죽여놓고 ‘내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라며 뻔뻔하게 대들었다. 라멕은 사람을 죽여놓고 ‘나 건들면 다 죽어.’라며 노래를 불렀다. 아담의 변명은 이제 귀여울 정도이다. 라멕을 지나 노아 시대에 이르면 하나님은 더 이상 사람들과 대화하지 않는다. 땅 위에 사람을 지으신 것을 ‘탄식’하시며 근심하셨다. 질문도 없고, 추궁도 없고 탄식만 남은 상황이 홍수 이전의 상황이다.


에덴은 어디있는가?

얼마 전, 즐겨보는 유튜브 채널에서 ‘에덴의 위치는 어디일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였지만, 한편으로는 ‘쓸데 없는 논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그들이 내린 결론(성경의 기록은 모순적이고 근거가 없다) 때문이 아니라 에덴을 실재하는 장소라고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였다. 구체적인 장소가 있었다면, 그것은 고대 근동 사람들이 생각하는 세계 전체, 유프라테스강부터 에티오피아(구스)까지를 이야기할 것이다. 다시 말해, 실낙원은 특정 공간으로부터의 추방이 아니라, 신과 합일하지 못한 인간의 추락에 대한 이야기이다.

마찬가지로 선악과 사건 또한 열매 하나가 없어진 사건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왕이 되려다 길을 잃어버린 사건이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과의 대화가 끊기고, 이웃과는 남 탓을 하며, 세상은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실낙원'을 살게 되었다.


두 번째 아담을 기다리며

그러나 성경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탄식하고 리셋하는 것으로 인류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아담이 실패한 그 자리, '불순종의 나무(선악과)'가 있던 자리에 하나님은 또 다른 나무 하나를 심으셨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달리신 '십자가'라는 나무다.

첫 번째 아담은 나무의 실과를 따 먹으며 "내 뜻대로 하겠다"고 반역했지만, 두 번째 아담인 예수는 나무 위에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며 순종하셨다. 선악과를 먹고 스스로 재판장이 되어 고통받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이제 생명나무이신 예수께로 나아오라고 부르신다. 그리고 생명 나무는 천사의 케루빔으로 감추어져 있다. 잃어버린 낙원을 찾는 길은 내 손에 쥔 판단의 돌을 내려놓고,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다시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작가의 이전글1장. 우주의 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