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가인에게 표를 주시며 보호하셨나?
성경에는 살인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되어 있다. 다른 고대 근동 제국들의 전통과 유사하게,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고 되어 있다. 심지어 성소에 들어가 제단뿔을 잡고 있어도 끌어내어 죽이라고 한다. 공소시효도 없다. 요압은 권력의 끈이 떨어지는 순간, 예전에 아브넬을 죽였던 죄를 소급 적용받아 죽었다. 도망가도 소용 없다. 아합은 갑옷 솔기 사이로 우연히 날아와 꽂힌 화살 하나로 나봇의 피값을 치른다.
살인을 엄하게 처벌하는 것은 죄악이 더 이상 확산되지 않게 하기 위한 종교적인 역할이기도 햇지만, 사회 구성원을 보호하고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했다. 작은 누룩 하나가 온 반죽을 부풀게 하듯, 작은 범죄를 엄히 다스리는 것은 공동체 전체의 유지에 필수적인 조치였다.
그런데 성경에서 기록하는 최초의 살인자, 그것도 친족을 죽인 가인은 왜 살려 주신 것일까?
가인의 살해 동기를 따라가 보면, ‘하나님이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지만,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는 구절에 눈이 멈춘다. 하나님이 아벨을 편애해서 가인이 비뚤어진 것이 아닌가. 역시, 모든 문제는 하나님 때문이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을까?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행간을 따라 몇 가지를 추론해 보자.
히브리서 9장 22절,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말씀에 근거한 전통적인 해석이다. 뭐, 아주 틀린 말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의미를 붙인 해석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이 가설대로라면, 레위기 2장에 설명하고 있는 소제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제사 방식이 된다. 레위기에서 왜 하나님이 받으시지도 않을 제사 방식을 기록하겠는가.
차라리 두 제관의 제사에 ‘정성’의 정도로 설명하는 편이 더 합리적이라 생각한다. 나이브하게 보이는 설명이긴 하지만 성경에 보면 기댈만한 표현이 실려있다.
“When it was time for the harvest, Cain presented some of his crops as a gift to the Lord. Abel also brought a gift the best portions of the firstborn lambs from his flock."
가인은 그의 수확물 중의 얼마간(some)을 가져왔지만, 아벨은 그의 양떼에서 초태생 양, 그 중에서도 가장 좋은(best) 양을 바쳤다”는 것이다. 조금만 더 상상력을 발휘해보면, 암양이 낳은 새끼 중 초태생을 구분해야 하고 그 중에서 가장 좋아 보이는 한 마리를 추적관리 했다는 거다. 뭐, 이 정도의 정성이라면 인정해 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에 비해, 편애의 원인을 제물에서 찾지 않고 제관에게서 찾는 해석도 있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The Lord accepted Abel and his gift, but he did not accept Cain and his gift.” 그러니까, 가인은 하나님이 받거나 받지 않으신 것은 제물 뿐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사람까지였다. 다시 말해, 단순히 하나님이 거부한 것은 가인의 제사가 아니라 가인 자신이었다. 그래서 가인은 그렇게 화를 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가인의 삶이 하나님이 인정할만한 삶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하나님이 가인에게 “네가 왜 화를 내느냐? 네가 좋은 마음을 품고 있다면 어찌 얼굴을 들지 못하겠느냐?”라며 가인의 마음 바탕이 좋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한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까지는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납득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벨을 죽일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 가인은 왜 이런 패륜에 이르게 된 것인가.
사람은 때로, 감정이 격해지면 이성의 끈을 놓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경우, 우발적으로 범행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성경은 가인이 아벨을 들로 데리고 나간다고 이야기한다. ‘들field’ 이라는 공간은 아담이 하나님을 피해 숨은 나무 그늘과도 같이 ‘아무도 보는 이 없는 장소’이다. 다시 말해, 목격자가 없는 장소를 골랐다는 말이다. 일시적인 충동에 의한 살인이라기에는 고의성이 다분해 보이는 부분이다.
가인과 하나님의 대화만 따로 떼어서 복기해 보자.
“하나님이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다. 이것이 가인을 매우 화나게 만들었고 가인은 실망했다. 그러자 하나님이 물으셨다. “너 왜 화가 났니? 왜 그렇게 실망했냐? 네가 올바로 행동했었더라면 네가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하지만, 네가 옳은 일 행하기를 거절했다면 조심해라. 죄가 너를 컨트롤하고 싶어서 문 앞에 도사리고 있으니까. 너는 죄를 진압하고 그것의 주인이 되어야 해. - You will be accepted if you do what is right. But if you refuse to do what is right, then watch out! Sin is crouching at the door, eager to control you. But you must subdue it and be its master. ”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가인에게는 기록되지 않은 죄가 더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악이 가인을 지배하려고 하는 것을 가인에게 직면시켰던 것. 하나님이 죄의 반란을 진압하고 죄를 다스리라고 경고한 것이다. 그리고 정체를 들킨 악이 가인을 지배하여 범죄를 짓게 만든 것이다. 자신의 악을 또 다른 인격으로 분리시켜 전가시키는 행태이긴 한데 원래, 범죄자들의 사고방식 아닌가.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이 들통나자, ‘누구든지 나를 만난 사람이 나를 죽일 것’이라고 두려워 한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만 따지면 당시, 세상에는 아담 부부와 가인과 아벨 밖에 없었다. 그러면 가인을 죽일만한 사람이 아담 밖에 없다는 말이 된다. 둘째가 죽은 것은 슬픈 일이나 그렇다고 해서 맏이를 자신의 손으로 죽인다는 것도 못할 짓이다.
다시 말해, 가인이 말한 ‘누구든지’는 외부에 다른 무리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지점에서 아담, 가인, 아벨을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보통 명사로 읽게 되는 지점이다. 환인과 웅녀가 혼인을 해서 단군을 낳았다던 신화를, 이주민 세력과 곰 부족의 연합으로 ‘의신화’하여 읽는 것처럼 농경 민족(가인의 후손)이 유목 민족(아벨의 후손)에게 행한 범죄라고 보는 것은 지나친 해석일까.
유목 민족과 농경 민족은 경쟁은 필연적이다. 농경 민족에게는 농사를 지을 땅이 필요했고, 유목 민족은 그 땅이 짐승을 먹일 목초지로 보였을 것이다. 결국, 땅을 두고 경쟁하던 가인 부족이 아벨의 부족을 멸절시킨 사건을 묘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땅의 거절과 유랑이야말로 농사꾼에게 내려진 최고의 형벌이다. "땅의 거절과 유랑" 하나님은 가인의 정체성인 '농경(정착)'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벌을 내리셨다. 농부에게 땅은 생명줄이다. 그런데 땅이 아벨의 피를 삼켰기 때문에, 이제 그 땅은 가인에게 효력을 내지 않았다(창 4:12). 가인이 아무리 비료를 주고 땀을 흘려도 땅은 더 이상 그를 돕지 않겠다는 선언.
농경민의 가장 큰 특징은 '정착'과 '안정'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유리하는 자"로 만드셨다. 이는 농경민 가인에게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치명적인 저주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가인은 이 형벌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고 '에녹'이라는 성(City)을 쌓았다는 것이다(창 4:17). 하나님은 "떠돌아다녀라"라고 하셨는데, 가인은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 성벽을 쌓고 뭉쳐 살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 문명(도시)'의 시초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그 표는 생명을 지켜주는 방패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이 자는 살인자다(건드리지 마라)라는 꼬리표였다. 마치 '주홍글씨'처럼. 사람들은 그 표를 보고 그를 죽이지는 않았겠지만, 그와 어울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결국 그는 육체적 생명은 건졌으나, 사회적으로는 철저히 고립되는 형벌을 받은 셈이다.
가장 전통적인 해석은 심판 중에도 베푸시는 은혜이다. 가인은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두렵습니다"라고 호소한다. 하나님은 살인자 가인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이 사적으로 복수하는 것(Vigilante justice)을 막으셨다. 생명에 대한 주권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원칙을 세우신 것. 살인자라 할지라도 인간이 함부로 심판하고 죽이는 '보복의 악순환'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셨다. 훗날, 라멕이 보복을 하고는 그것을 자랑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지만.
반면, 가인과 아벨 사건을 유목민족과 농경민족 사이의 갈등으로 확대 해석하면 - 가인 이마의 표식은 문신이나 분장을 의미할 수도 있다. 고대 부족 사회에서 특정 부족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마에 문신을 하거나 독특한 표식을 하여 "우리 부족 건드리면 끝까지 복수한다"라는 경고를 보냈다. 성경 저자가 가인 이야기를 통해 이 호전적인 유랑 부족의 기원을 설명하려 했다는 해석도 있다.
가인이 동생을 죽인 나쁜 사람이지만,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이 가인을 죽이지 못하게 막아주셨다. 이것은 마치 부모가 자식이 큰 잘못을 해서 매를 들고 혼내더라도, 그가 죽기까지 바라지는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온 세상이 흉악범에게 돌을 던질 때에도 그 앞에서 대신 돌을 맞아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이랄까. 가인의 죄성을 물려받은 우리 모두는 가인을 살려 두신 하나님을 보며 죄인도 긍휼을 얻을 수 있다는 위로를 얻게 된다.
그리고 어떠한 명분으로든 다른 살인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며 노심초사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엿본다. 그는 범죄를 저질렀지만, 그 대가를 치르게 하기 위해 또 다른 범죄가 일어나기를 원치 않으셨다.
하지만 가인은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거부한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유랑하며 새로운 방식으로 삶을 시작했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에녹성을 쌓아 그 안에 칩거하며 자신을 지키려 한다. 이마의 표를 문신이나 가면이라고 보면, 두려움에 시달리며 자기 보호 본능에 매달리는 인간의 가련한 운명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문신은 보는 사람들을 겁주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는 애벌레들의 안상문이나 경악색과 다를 바 없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험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하여는 "돈이나 권력이 있든지 그렇지 못하면 하다못해 주먹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지극히 단순하되 정곡을 찌른 달관을 이 서투른 문신은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