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의 홍수 이야기
학교 현장에 있다보면 지독하게 말을 듣지 않는 학생이 꼭 한 명씩은 있다. 교사로서 적절하지 않은 생각이지만, 가끔씩은 정말 한 대 패고 싶은 충동이 올라올 때가 있다. 하지만 체벌은 필연적으로 감정의 에스컬레이터를 타게 되어 그 의도와 상관없이 어떤 동기와 이유도 합리화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러면, 철저하게 감정이 배제된 체벌이라면 정당화될 수 있을까. 감정이 실리지 않고 철저하게 규정대로 체벌이 이루어진다면 체벌이 가능한지 궁리하는 것이다. 학교에 체벌실을 두었고 감정적으로 체벌하는 것을 막기 위해 ‘체벌하는 기계’까지 고안했다는 영국의 사립학교들의 시스템 같은 것을 적용하면 어떨까를 상상하는 것이다.
진짜, 오해하지 마시라. 순간적으로 욱, 할 수는 있어도 내가 그 녀석이 미워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잔소리해도 듣지 않으니 - 때리면 좀 말을 들을까, 신체에 고통이 가해지면 행동의 변화가 있을까 싶은 기대감(?) 때문이다. 또는 순수한(?) 궁금증이기도 하다. 뭐, 어린 시절에 부모님이나 선생님에게 맞고 인간이 되었다는 간증(?)도 있긴 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우리 속담에도 있지 않은가. 매가 약이다.
성경 만화를 보면 사람들이 싸우거나 술을 마시거나 하는 장면으로 묘사되어 있다. 학생들이 보는 책에 더 이상 자세하게 설명할 수 없는 내용이겠지만 - 그런 내용의 책을 접하다 보면 학생들이 생각하는 노아 시대의 죄는 음주, 흡연, 성적 방종 등 미성년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금단의 열매를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당시 세계에는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창6: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창6:4]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성경이 문제 삼는 핵심은 권력의 남용에 대한 것이다. “보기에 좋으므로 데려갔다” 선택이 아니라 강탈에 가까운 관계라는 것. 네피림의 존재는 신적 영역이 경계를 침범하여 인간 세계를 점령해서 땅위에 폭력이 증폭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네피림은 “용사”, “고대의 명성 있는 사람”이라 불리우지만 그 결과는 땅에 포악함이 가득하게 된다.
이를 통해 보건대, 성경은 힘의 낭만화를 경계하며, 폭력의 영웅화를 배격하고 예외적 존재에 대한 미화를 거부한다. “세계 평화는 영웅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 아니며 경계를 지키는 절제와 책임이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다."는 메시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왜 세상을 리셋하길 원하셨을까. 선악과 사건 이후, 권력을 탐하는 인간 본성으로는 세상에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보았을 것이다. 그러면 리셋하면 인간에게 희망이 있을거라 생각하셨을까. 노아라면, 그의 아들이라면, 새인류를 선하게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외경이라 인용하기 조심스럽지만 - ‘희년서’에서는 홍수 이후에도 여전히 악에 시달리는 노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노아는 홍수로 모든 악이 씻겨 내려갔다고 믿었으나, 다시 창궐하는 악 앞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다. 악한 영들이 자신의 자손들을 다스리지 못하도록 해 달라고 말이다. 하지만, 악마들의 우두머리 ‘마스테마(Mastema)’가 ‘사람의 자손들은 죄악과 타락의 성향을 여전히 갖고 있다’는 이유로 지상에 사탄을 남겨두어 인간을 시험하게 하셨다.”
물론, 문자적으로 하나님과 사탄이 거래를 하셨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사람은 근본적으로 악하며, 달라질 수 없다. 심지어 홍수에서 살아남은 자신과 자녀와 손주들까지도 그 본성을 벗어나지 못하며 몇 세대 후에는 다시 악이 세상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는 비관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노아의 포도주 사건을 들고 있는데 - 이것은 단순히 자기를 절제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노아의 포도주 사건이 아담의 선악과 사건과 정확하게 같은 구조로 진행된다.
아담은 만들어진 에덴 동산에서 금단의 열매를 먹고, 벌거벗음을 깨닫고 수치를 가리고 저주를 받는다. 노아는 포도원을 만들고 포도주를 마시고 벌거벗었으며 셈과 야벳이 수치를 가려주고 가나안을 저주한다. 즉, 하나님이 세상을 물로 깨끗이 씻어내고(리셋), 당대에 가장 의로운 사람(노아)을 통해 ‘새 에덴(포도원)’을 시작하게 하셨음에도, 인간은 결국 똑같은 패턴으로 무너짐을 보여준다는 것. 이것은 "환경이 바뀐다고(리셋) 인간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라는 인간 존재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장면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괜한 수고를 하신 것일까. 홍수 이후에도 인간에게는 희망이 없는 것일까. 하나님은 왜 약속의 무지개를 보여주셨을까.
홍수 심판은 일종의 ‘강제적 정화’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홍수 이후에 ‘공포(홍수/매)’로는 인간의 중심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셨다. 만약 하나님이 단순히 ‘죄 없는 깨끗한 세상’만을 원하셨다면, 인간을 로봇처럼 만드시거나 매번 리셋 버튼을 누르시면 된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인격(Person)’으로 대우하기로 결정하셨다. “맞아서 말을 듣는 노예”가 아니라, “유혹 속에서도 아버지를 선택하는 자녀”를 원하셨기에, 그 위험한 자유를 다시 허락하신 것이 아닐까?
창세기 8장 21절은 홍수 사건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다.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이 구절은 역설적이다. "인간은 안 바뀌는구나. 그러니 내가 싹 다 쓸어버려야지"가 아니라, “인간은 원래 악하구나(안 바뀌는구나). 그러니 이제는 내가 방식을 바꿔야지"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악에 굴하지 않는 완벽한 사람"을 찾으셨다기보다는, "악에 넘어지더라도 다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을 기다리기로 하신 것이다.
다수가 변하기를 기대하신 것이 아니라, 그 ‘한 사람’을 통해 세상이 유지되고 구원의 불씨가 꺼지지 않기를 바라셨던 것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