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탑 이야기
인간은 자연과 인생에서 벌어지는 불가사의하고 불가항력적인 일에 대해 운명과 신을 경외하게 되었다. 반대로, 원인도 알 수 없고 납득할 수 없는 운명에 반항하며 신에게 끊임없이 도전하는 영웅을 동경해 오기도 했다. 오늘 살펴볼 바벨탑 이야기와 같이 ‘신적 권위에 도전하는 인간'이라는 주제는 인류 역사와 문학을 관통하는 거대한 원형 중 하나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신의 영역에 도전한 인물이 엄청 많다. 밀랍으로 만든 날개로 신이 있는 하늘까지 날아오르려 한 이카루스, 신들의 불을 훔쳐 인간에게 전해 준 프로메테우스, 아테나 여신과 베짜기 내기를 한 아라크네, 키메라를 물리친 승리감에 페가수스를 몰고 올림포스 산을 침범한 벨레로폰 등등. 그리스, 로마 신화 자체가 인간과 신의 끊임없는 갈등과 투쟁으로 이루어져 있는 듯하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는 친구 엔키두의 죽음을 보고 신이 정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불로초를 찾아 떠났던 길가메시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렇게 인간은 태생적으로 신을 동경하고 경외하면서도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고자 하는 욕망을 갖고 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신에게 끊임없이 도전해 왔다. 그리고 그들의 용기와 의지를 칭송해 마지 않았다. 왜냐하면, 신들은 변덕스럽고 질투심이 많은 존재로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인간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에서의 하나님은 창조주이자 완전한 선으로 상정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도전은 용기가 아니라 피조물로서의 근원을 부정하는 패륜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것도 뱀이, ‘그걸 먹으면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 꼬드긴 탓이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던 아담과 하와의 욕망이 투사된 것. 노아의 홍수 이후로도 인간들은 그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하늘에 닿기 위해 성과 대를 쌓았다.
사실, 이 부분은 심정적으로는 이해가 되는 지점이다. 실제로는 수백 년 후의 일이겠지만 - 바벨탑 바로 앞 페이지를 넘겨보면 노아의 홍수 사건이다. 다시 말해, 그들의 기억 속에 노아의 홍수는 ‘역사적인 트라우마’처럼 각인되어 있다. 희한한 것이, 일면식도 없이 살아온 사람들이고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을 텐데 역사적으로 보면 비슷한 일이 다른 문화권에서도 종종 나타난다는 것이다. 인류에게는 태고로부터 전해오는 어떤 공통된 경험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하게 되는 부분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시 대홍수가 덮칠 것이고 우리는 그 홍수를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노아가 배에 발랐던 방수용 재료인 역청을 사용하여 물에 떠내려가지 않는 성을 쌓게 된 것이다. 노아는 배를 만들어 물살에 운명을 맡겼지만 우리는 성과 대를 쌓아 흔들리지 않으리라.
이 행동은 ‘다시는 대홍수로 인류를 멸절시키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약속(언약)에 대한 불신이 바벨탑의 기초가 된 셈이다. 요세푸스는 그의 저서 <유대 고대사>에서 "바벨탑 건설을 주도한 니므롯은 신이 다시 세상을 물에 잠기게 할 경우를 대비해, 물이 닿지 않을 높은 탑을 쌓아 신에게 복수하려 했다"고 평한다.
또한, 그들은 이러한 행위가 자신들을 유명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 생각했다. 예나 지금이나 고층 건물은 문명, 기술의 총아인가 보다. 지금도 지구 곳곳에 경쟁적으로 가장 높은 마천루를 짓고 있지 않은가.
스스로 선악의 기준이 되고 싶다는 욕망을 넘어 아무에게도 나의 잘못을 지적받고 싶지도 않으면서 모두에게 나의 이름을 알리고 싶은 욕망까지. 인간은 끊임없이 신의 영역을 침범해 왔나보다.
하나님은 이 일을 막는 방법으로 '언어를 혼잡하게 한다'는 생각을 어떻게 하시게 되었을까? 홍수는 다시 일으키지 않겠다 하셨으니, 지진이나 낙뢰 등으로 무너뜨리면 되지 않나? 언어를 혼잡하게 하면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끼리 또 문명을 건설할텐데 말이다.
하나님은 노아 홍수 이후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축복하셨다. 그런데 이들은 뭉쳐서 흩어짐을 면하려 했다. 여기서 물리적인 힘(지진 등)으로 그들을 죽이는 것은 '보존의 약속'과 맞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들을 죽이는 대신, 그들의 '프로젝트만' 무산시키는 방법을 택하셨다.
또한, 사람은 참 묘한 것이 어려움이 닥치면 흩어지기도 하지만 또 뭉치기도 한다. 지진으로 무너뜨렸다면 인간들은 ‘우리가 힘을 합쳐 더 튼튼하게 다시 짓자.’라며 더 단결했을 것이다. 하지만, 말이 통하지 않게 된다면 신뢰가 깨지고 협력이 불가능해진다. ‘잘못된 연합’을 깨뜨리는 가장 효율적인 소프트웨어적인 처방이었다.
거기에 더해, 죄의 본질은 관계의 단절이라는 점에서 - 죄의 결과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깨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인류학이나 언어학에 대해서 무지한 일반인의 상식으로도 “이동 및 격리 > 언어의 분화 > 민족 형성”의 순서가 맞다. 그런데 성경(창세기 11장)은 “언어의 혼잡 > 이동 > 민족 형성”으로 설명하니 인과관계가 거꾸로 된 것처럼 보인다. 이 문제는 성경의 서술 구조(창세기 10장과 11장의 관계)를 보면 이해의 실마리가 보인다.
먼저는 플래시백(Flashback) 기법이다. 창세기 10장은 이미 노아의 자손들이 각 나라와 언어대로 나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10:5, 10:20, 10:31). 즉, 결과(다양한 언어와 민족)를 먼저 보여준다. 그런데 뒤이어 나오는 창세기 11장은 갑자기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라고 시작한다. 많은 학자들은 11장의 바벨탑 사건을 시간 순서상 10장의 민족 분화가 일어나기 이전의 사건, 혹은 10장의 분화가 왜 일어났는지 설명하는 원인담(Etiology)으로 본다. 다시 말해, 결과를 먼저 이야기하고 원인을 설명하는 방식이라는 것.
또한, 성경 저자는 과학적인 언어 분화 과정을 설명하려는 목적보다는, "왜 인간은 서로 흩어져 싸우고 소통하지 못하는가?"라는 근원적 질문에 답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일반적인 역사라면 "지형이 가로막혀 말이 달라졌다"고 하겠지만, 성경은 이를 "인간의 죄(교만)로 인한 신의 심판’이라는 신학적 인과관계로 재구성한 것이라고 본다.
요약하자면 과학적, 역사적 팩트는 '흩어져서 말이 달라진 것'이 맞을 것 같다. 하지만 성경은 이 현상 이면에 있는 영적인 원인(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연합은 결국 불통으로 귀결된다)을 강조하기 위해, '언어의 혼잡'을 흩어짐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설정한 것이다.
그러면, 이 논리에 따르면 바벨탑 사건을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사건이 아닐까? 아니면, 일회성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묘사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해, 성을 짓다 중단된 어떤 사례는 있었겠지만, 언어의 분화와 연결시켜 이해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생각한다.
실제 바벨탑의 원형이라고 여겨지는 지구라트들은 고대 바빌로니아 지역에서 여럿 발견되고 있다. 그 중, 가장 컸던 몇몇 지구라트를 보고 위압감을 느껴 바벨탑 이야기가 만들어졌다고 하기도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바벨탑의 원형이라고 여겨지는 지구라트가 실은 신을 위한 신전이었다는 거다. 인간의 교만을 드러내기 위한 건축물이 아니라 신과 가까운 - 높은 곳에서 신을 만나려고 한 건축물인데 하나님이 오해하신 것은 아닐까? 아니면 단지, 하나님 당신이 아닌, 이방 신을 섬기는 신전이라 중지시킨 것일까?
당신은 종교 건축물을 짓는 순수한 의도를 믿는가? 한 개인에게는 그러할 수 있어도 군주나 공동체의 차원에서는 순수한 ‘종교’ 건축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와 사상의 우월성을 드러내고 경제적 부와 왕권의 우수성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신의 영광을 표현함으로써 신의 대리자로서의 자신의 입지를 높이는 방식 - 이것이 ‘자기 이름을 내는 방식’ 중 하나일 것이다. 성 소피아 성당이나 파밀리아 성당을 보며 하나님을 떠올리기 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나 유스티아누스 황제, 가우디를 먼저 떠올리게 되지 않는가. 그들의 신앙심을 폄훼하는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신의 이름이 아니라,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게 되더라는 거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에게 쌓는 제단은 돌로 쌓으라 하셨나 보다.
그리고 사실, 이것이 더 큰 문제인데… 바로 집단 도시 문명이, 신을 닮은 선한 본성을 좀 먹고 있다는 점이다.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의 구호는 "우리의 이름을 내자(Let us make a name for ourselves)"였다(창 11:4). ‘내 이름’이 아니라 ‘우리의 이름’. 여기서 ‘우리’는 연대와 협력, 화합의 의미가 아니라 개성이 말살된 획일적인 집단을 가리킨다. 내가 누구인지 중요하지 않고, 탑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의 부속품이 되어버린 상태를 말한다. 이 상태에서는 한 인간으로서의 윤리보다는 공동체의 이익이 선악의 기준이 된다.
존 스타인벡은 “에덴의 동쪽”에서 이러한 집단 도시 문명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의 의식주가 복잡한 대량생산을 통해 만들어지면 그것이 우리의 사고를 통제하고 다른 감각을 모두 마비시킨다. 우리 시대에는 대량 생산 혹은 공동 생산이 정치, 종교, 경제에 파고들고 있다.”
그러면서 ‘나는 무엇을 믿고 사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싸우고, 무엇에 대항해야 하는가?’를 물으며 “개인을 제한하고 파괴하는 사상, 종교, 또는 정부에 대해 우리는 대항해서 맞서 싸워야 한다.“고 독려한다.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이 바벨탑 사건 직후에 기록된 것이 '아브라함'이라는 한 개인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에게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라고 약속하신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게 함으로써 집단에서 끄집어내어 홀로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로 세우시는 모습이 대조되어 나타난다.
바벨탑 공사를 중단시킨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했기 때문이 아니라, 군중 심리에 휩쓸리고 문명의 발전에 취해 스스로가 누구인지 잊어버린 인류 문명에 브레이크를 밟은 사건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을 흩으신 것은 형벌이 아니라, 집단 최면(군중심리) 속에 잠들어 있는 인간을 깨워 '너 자신'으로 살게 하려는 구원의 손길이었을지도 모른다.
남들이 가는 대로 휩쓸려 가고,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대로 생각하는 삶. 그것이 바로 현대판 바벨탑 아래 사는 사람들의 모습은 아닐까. 중소 기업들을 게걸스럽게 합병하고 자본과 기술을 독식하는 글로벌 거대 기업들은 현대판 바벨탑이며 그들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비판없이 소비하며 군중의 여론에 끌려다니는 나는 "영혼이 없는 껍데기"일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대한 탑의 부속품'으로 안주하기보다, 거친 광야일지라도 '고뇌하는 인간'으로 서기를 원하셨기에 바벨탑을 중단시키시고 한 개인으로 나를 부르고 계신다. 바벨탑을 중단시키신 것은 나를 한 개인으로 부르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