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심에서 변방으로
사람이 많은 곳에 보내야 더 많이 성장하게 되고 기회를 잡는다는 의미의 속담이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조상님들의 말씀대로, 서울로 모여 들어 지금은, 전체 인구의 절반이 수도권에 모여 사는 ‘서울 공화국’이 되었다.
성경에서도 권력의 중심에서 하나님의 일꾼으로 크게 쓰임 받는 사람들이 많다. 이집트의 총리였던 요셉, 바빌로니아의 관리였던 다니엘, 페르시아 왕의 왕후였던 에스더, 술 맡은 관원 느헤미야 등등. 모두 권력 가까이에서 선한 영향력으로 하나님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썼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부모들은 ‘자녀가 좋은 학교를 나와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기를’ 기도한다.
뭐, 나쁠 것은 없다. 개인적으로도 하나님의 백성들 모두가 더 잘 살고 힘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중심으로 가야하나, 싶다.
아브라함 집안은 바빌로니아 우르 지역에서 살았다. 전승에 따르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을 만들어 파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아브라함이 우상 가게를 부수며 “우상은 가짜다”라고 주장했고, 이 사건으로 인한 소동에서 하란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전설이 사실이든 아니든, 데라는 아들의 죽음으로 ‘신에 대한 회의’를 느꼈고 그 허무함과 신들에 대한 배신감 때문에 우르를 떠났을 것이다. 데라에게 ‘우르’는 화려한 문명과 번영의 도시가 아니라 ‘아들을 삼킨 땅’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유프라테스 강줄기를 따라 쭉~ 올라가다 하란이라는 도시에 닿는다. 히브리어 원어로 보면 데라의 아들은 하란(Hārān, הָרָן) - '산악인' 혹은 '강한 자'라는 뉘앙스의 이름이며, 도시의 이름은 카란(Chārān, חָרָן) - '통로', '교차로', 혹은 '마른 땅'이라는 뜻이다. 발음이 죽은 아들 이름과 비슷한 도시에 당도한 데라의 마음이 어땠을까? 어쩌면 데라는 그 도시의 이름 때문에, 혹은 그곳이 주는 어떤 익숙함 때문에 더 이상 발을 떼지 못하고 그자리에 주저앉았을지도 모른다. 더구나 우르와 비슷한 문화를 가진 도시였다면 더더욱. 그래서 데라는 가나안(하나님의 약속의 땅)까지 가지 못하고, 슬픔의 이름과 닮은 도시 '하란'에 머물다가 거기서 생을 마감한다(창 11:32).
뒤에 아브라함과 이삭이 아들들의 혼처를 하란 근처에 사는 친척들 집에서 구한 것으로 보아 데라의 집안 뿐 아니라, 온 집안이 함께 왔으니 생을 마칠 때까지 하란에 주저 앉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봐야겠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나선 동기에 대해 ‘하나님이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해서’라고 생각해 왔었다. 하지만 아브람 가문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니,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데라는 아들을 잃은 슬픔 때문에 우르를 떠났다. 결국 그 슬픔(하란)을 넘어서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멈췄다. 반면, 아브람은 하란에서 아버지를 잃고 난 후에 가나안으로 출발한다.
사람들은 때로, 아픔과 실패의 좌절 때문에 새로운 출발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아브람 가족의 새로운 출발 또한, ‘신앙적인 이유만으로 떠난 것일까?’를 의심하는 것이다. 그저 너무 힘겨운 시간을 피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왜냐하면… 나는 그랬거든. 내 인생사를 아는 이의 얼굴을 마주볼 자신이 없었거든. 위로의 말 한 마디를 받을 자신도 없었거든. 떠나간 아이의 흔적이 남은 곳을 가기가 힘들었거든.
아브라함의 이주를 너무 감상적으로 바라본 것은 아닐까. 혹시, 아브라함은 새로운 기회를 찾아서 계산적으로 - 나선 것이 아닐까. 우르는 구바빌로니아 왕국의 핵심 도시 중 하나였다. 그리고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여러 도시가 늘어서 있는데 하란은 구바빌로니아 왕궁의 영향권 밖의 도시다. 그리고 가나안 땅은 그 인근의 다른 왕국들에서도 완전히 벗어나 - 오히려 이집트 문명권에 가까운 곳이었다. 아브라함은 단지, 바빌로니아를 벗어난 새로운 문화와 언어, 환경 속에 자신의 삶을 던짐으로써 새로운 기회를 잡으려고 한 것은 아닐까. 그래서 가나안에 기근이 들자, ‘여기가 아닌가 보다, 더 좋은 기회를 찾아가자’는 판단으로 이집트로 내려갔던 것이다.
숏폼 영상을 뒤지다가 우리나라의 극한의 추위와 더위, 자원도 없는 화강암 덩어리 땅을 물려준 단군과 조상들을 원망하는 영상을 보았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히브리인들 앞에서는 원망하기 머쓱하다.
근동의 패권은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번갈아가며 차지했고 가나안 땅은 두 문명이 충돌하는 전장이었다.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카데시 전투, 십자군 전쟁, 현대의 중동전쟁까지. 농사 짓기에 적합한 기후도 아니고, 물이 풍부한 곳도 아니며, 하다 못해 석유가 나는 곳도 아니면서, 전쟁만 숱하게 일어나는 문명의 경계에 터를 잡게 하다니, 부동산 사기로 하나님을 고소해야 하지 않겠는가. 적어도 아브라함을 원망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이 아브람과 맺은 약속을 복기해 본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 것이다.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12장 1~3절)”,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겠다.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겠다. (창13:14~17절)”, “네 자손을 뭇별만큼 많게 하겠다(창 15:1~5)”,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겠다.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하겠다(창 22:16~18)”
그러고 보니, 이 계약서에는 ‘아들을 주겠다, 네 자손을 별과 같이 많게 하겠다,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겠다, 너에게 이 땅을 주겠다, 네 자손 때문에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하겠다’ 등등은 있지만 ‘경제적 부’나 ‘강성한 군사력’은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왜 속은 기분이 들까. 하나님의 약속에 우리의 욕망을 투영하여 계약서를 잘못 읽은 것이다. ‘내 이름이 창대하게 되려면 군사력으로 정벌해야 하고, 군사 강국이 되려면 자손이 창대해야 되며 복을 받기 위해서는 경제적으로 부유해야 한다’는 고정 관념 내지, 자신의 욕망을 투영시켜 계약서를 오독하고 계약 위반이라고 쌍심지를 켜고 달려드는 꼴이다.
이스라엘은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등 이스라엘은 오고 가는 모든 제국에게 짓밟혔다. ‘아무리 죄를 지었다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 너무 하신 것 아닙니까’ 선지자들의 울음에도 침묵하시며 철저히 짓밟히도록 내버려 두셨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의 핵심은 '이스라엘 민족의 번성’이 아니라 "너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복을 얻는 것"이었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저수지'가 아니라, 흘려보내는 '통로'가 되라는 주문이었다. 구석에 숨어서 번성하기만 했다면 이스라엘은 다른 문화에 정복, 흡수되거나 정체성을 잃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제국이 충돌하는 그곳은 하나님이 만드신 거대한 '교차로'였고, 세계의 무대 위였다.
이스라엘은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로마 등의 제국에게 짓밟혀야 했다. 군사적으로는 완벽한 패배였다. 하지만, 그 제국들은 다 사라졌지만 히브리 민족의 경전(성경)과 유일신 사상은 제국들의 도로와 언어를 타고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제국들이 이스라엘을 삼켰는데, 소화되지 않고 오히려 제국의 핏줄을 타고 바이러스처럼 전파된 것이다.
이것은 육체(국가)는 죽어도 정신(신앙)은 살아남아 정복자를 감염시켜 유전자를 퍼뜨리는 ‘밈(Meme, 문화 유전자)의 개념과도 겹쳐 보인다. 그걸, 예수님은 이렇게 표현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 12장 24절)
그렇다고,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서 패배하며 짓밟히면서 살기를 원하시는 것은 아니다. 가장 위험한 곳에 던져 두시고는 기어이 살아남게 만드셔서 당신의 살아계심을 증명하기를 원하신 것은 아닐까. 이것이 하나님의 지독한 역설인지도. 우리는 자녀가 ‘서울의 중심’에서 호랑이가 되기를 기도하지만, 하나님은 자녀를 ‘광야’로 보내 끈질긴 잡초가 되기를 원하시는 건지도 모르겠다.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지만, 잡초는 결국 온 들판을 뒤덮을테니까.
문득, 시험 문제 틀렸다고, 수업 중 오답을 말했다가 선생님께 무안을, 친구들의 조롱을 받았다며 풀이 죽어 오던 딸아이의 얼굴이 떠오른다. 나 또한, 내 아이가 ‘서울’로, ‘중심’으로, ‘안전하고 높은 곳’으로 가기만을 바랐다. 친구들에게 1등으로 인정받고 돋보이는 칭찬을 듣는 그 ‘중심’의 삶 말이다. 그게 복이라고 믿었으니까.
어쩌면 진짜 복은, 비옥한 우르에 머물며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척박한 가나안에서 매일 하늘을 쳐다보며 "하나님, 오늘은 비가 올까요?"라고 묻는 그 가난한 마음 속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 딸아. 1등을 놓쳐도 괜찮다. 선생님의 칭찬이 좀 인색해도 괜찮다. 중요한 건 네가 지금 서 있는 그곳이, 하나님이 너를 빚어가시는 가장 치열하고도 아름다운 무대라는 사실이니까. 아브라함처럼, 조금 비겁해도 좋으니 그저 버티고 살아남아다오. 그것만으로도 너는 이미 충분히 복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