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을 위해 가족을 팔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기도 하지만, 이름을 부르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기도 한다. 홍길동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기 위해 세상을 소란케 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사랑을 위해 각자의 가문의 이름을 버리기로 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를 주(主)로 고백하기 위해 죽음을 택했다.
그러나 성경이 보여주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그는 아내를 아내라 부르지 못하고 누이라 속여 다른 사람의 품으로 보낸다. 그는 왜 이렇게까지 비겁해질 수밖에 없었을까?
처음 창세기를 읽었을 때부터 이 부분에 대해 이해되지 않았다. 거리의 불량배 앞에 여자 친구를 넘겨주고 도망가는 3류 영화의 조연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행동은 한 여자의 지아비로서도 자격 미달이지만, 부족장으로서의 리더십에도 치명적인 결함처럼 보인다. 아브라함은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아브라함이 사라를 누이라고 속인 것은, 그런 방법까지 써야 할 만큼 사회가 험하고 상황이 절박했기 때문이다. 고대 근동 사회에서는 남편이 살아 있는 여인을 데려가면 간통이 되지만, 남편을 죽이고 데려오면 합법적인 혼인이 된다는 - 왜곡된 윤리가 작동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므로 ‘저들이 나를 죽이고 아내를 빼앗을 것’이라는 아브라함의 공포는 단순한 피해 의식이 아니라, 현실적인 생존 확률 계산에서 나온 판단이었다.
더구나, 이것은 부부간에 합의된 전략이기도 했다.
"여보, 나는 당신이 얼마나 아리따운 여인인가를 잘 알고 있소. 이집트 사람들이 당신을 보고서, 당신이 나의 아내라는 것을 알면, 나는 죽이고 당신은 살릴 것이오. 그러니까 당신은 나의 누이라고 하시오. 그렇게 하여야, 내가 당신 덕분에 대접을 잘 받고, 또 당신 덕분에 이 목숨도 부지할 수 있을 거요." (새번역, 창 12:12-14)
본문에 따르면 이것은 우발적 거짓이 아니라, 집을 떠날 때부터 부부가 합의한 장기 생존 매뉴얼에 가깝다. 다시 말해, 부부 간에 합의가 된 내용이며 사래는 억지로 끌려간 피해자보다, 남편과 부족의 생존을 위해 동조한 정치적 파트너에 가까웠다. "내가 희생해서 우리 가문이 산다면..."이라며 가장의 무게를 분담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이 질문은 꺼내기 불편한 질문이다. 설교 말씀이나 주석에서는 이 부분을 '거룩한 상상력'으로 덮어두거나 에둘러 표현하며 슬쩍,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한 남자이자 남편의 입장으로" 이 본문을 직면할 때 피할 수 없는 질문이도 하다. 그리고 인정하기 싫지만, 사래는 파라오와 잠자리를 가졌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성경은 정확한 시간을 밝지 않지만, 사라가 파라오의 하렘으로 갔다가 아브라함에게 돌아오기까지 최소 수주에서 수개월이 소요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파라오의 집안에 ‘큰 재앙’이 임했고, 고대인들이 그것을 신적 징벌로 인식하고 원인을 특정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또, 아비멜렉 사건에서는 하나님은 "내가 너를 막아 그에게 범죄하지 않게 하였으니 여인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함이라"(창 20:6)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창세기 12장에서는 이러한 설명이 등장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파라오도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 Why did you say, 'She is my sister,' so that I took her to be my wife? (창 12:19)”라고 과거형으로 말한다. 이러한 정황들은 독자로 하여금 불편한 상상을 하게 만든다.
본문은 사라를 보낸 이후 아브라함의 내면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의 입장에서 상상해 보면, 그는 무력감과 수치심으로 무너졌을 것이다. 아브라함도 인간인데 왜 괴롭지 않았겠나.밤마다 왕궁 쪽을 바라보며 상상되는 그 일들로 몸서리를 쳤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내가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비겁한 합리화로 그 고통을 억누르려 했을 것이다.
부족 사람들의 눈에 아브라함은 "힘은 없지만 머리는 비상한 리더"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야, 우리 족장이 파라오를 속여서 저 많은 재산을 뜯어 냈대!"라는 식으로. 하지만 영적인 권위는 크게 상처입었을 것이다. 이 수치스러운 경험은 훗날 하갈 사건과도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아브람을 한심스럽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같은 잘못을 두 번 반복한다는 것이다. 바로 - 아비멜렉에게 사래를 갖다 바친 사건이다.
이번에도 그는 사라를 누이라고 소개했고, 사라는 아비멜렉의 왕궁으로 불려간다. 그러나 이번에는 하나님이 즉각 개입하신다. 아비멜렉은 꿈속에서 하나님의 경고를 받고, ‘나는 아직 그녀에게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성관계를 갖지 않았습니다) ’(창20:4)라고 항변한다. 그날 밤의 개입으로 사라는 보호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아비멜렉 집의 모든 태를 닫으셨다’는 구절은 장기간의 불임이라기 보다 성관계 자체가 불가능한 급성 질환으로 이해된다. 불임을 확인하고 다시 치료되려면 최소 1~2년은 걸려야 하지만 데려온 다음 날 바로 나타나고 아브라함의 기도로 일찍 사라졌다는 기록이 있다.
기가 막힌 것은,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행위는 아들(이삭) 대에서도 반복된다는 거다.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선택은 한 사람의 실수가 아니라 가문 안에서 되풀이된다.
‘아비멜렉’은 '아비(Abi, 나의 아버지)' + '멜렉(Melech, 왕)'의 합성어로 "나의 아버지는 왕이다" 혹은 "왕의 아버지"라는 뜻으로 혈통적 정통성을 과시하는 왕조의 칭호였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이삭 부자는 아비멜렉 부자에게 아내를 빼앗길 뻔 했다는 거다. 이것을 가문 간의 악연이라고 해야할지, 반복되는 인간적 약함으로 이해해야 할지.
아브라함은 이 사건을 "부끄러운 실수"로 가르쳤을지, 아니면 기지를 발휘해서 살아 남은 ‘처세술’로 전수했을지 모르겠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성격이 비슷하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아브라함 또한 신중하며 계산적인 사람이었고, 이삭도 유순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위기 상황에서 정면 돌파(싸움)보다는 회피(거짓말)를 선택하는 성향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신중함을 더 짙게 닮은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브라함을 비난하고 싶어서 이 글을 쓴 게 아니다. 그의 민낯을 드러내어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려는 것도 아니다. 모범적인 신앙의 위인이 아니라, 권력 앞에서 비겁해지고 방황했던 한 인간을 날것 그대로 보고 싶었다. 그래야만 흔들리고 방황하는 나 역시 언젠가 믿음 위에 설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반복된 잘못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끝내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마침내 복을 주시고야 마는 그분의 집요한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