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소돔으로 떠난 롯은 왜 돌아오지 않았나

창세기의 탕자, 롯

by 이진석

성경에는 선택받지 못한 조연이 여럿 등장한다. 악인이라고 하기는 애매하지만, 그리 성공적인 마무리를 하지 못해 여러 신앙인들에게 반면교사로 인용되는 인생들.

요즘 나는 이상하게 이런 인물들에게 자꾸 마음이 간다. 아마도, 내 삶이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그들의 삶을 함부로 평가하기도 조심스럽다.

오늘, 묵상의 주인공은 롯이다. 한때는 아브라함과 함께 약속의 땅을 향해 길을 나섰고, 한때는 누구보다 현실 감각이 뛰어났던 사람. 그런데 그의 인생은 끝내 밝은 결말을 맞지 못한다. 롯을 읽으며 나는 자꾸 그를 변호하고 있었다. 그 역시 최선을 다해 살았을 뿐이라고, 세상의 논리를 따른 것뿐이라고.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내가 롯을 변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나 자신을 변호하고 있다는 것을.


롯은 왜 아브라함과 함께 가나안으로 갔을까?

롯은 아브라함에게 얹혀 사는 객식구가 아니었다. 우르에서 하란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미성년자였다면 재산 처분과 운용에 제한이 있었겠지만,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나설 때에는 이미 성년이었을 것이고 아버지의 유산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독립하지 않고 아브라함을 따라 나선 것은 아브라함의 세력에 기대서 보호받으며 새로운 기회를 누리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리고 아브람도 아브람 나름대로의 계산으로서는 자기의 후계자가 없을 때 롯을 자기의 후계자로 삼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일종의 보험처럼 말이다.


후계자 자리를 박차고 나선 이유는?

반대로, 롯의 입장에서도 자식이 없는 삼촌이, 아버지 없는 자신을 데리고 간 이유를 대강 짐작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롯은 아브라함을 이어 족장의 지위와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할 수 있다. 그런데 롯은 후계자 자리를 박차고 떠난다.

가장 큰 이유는 ‘나도 자립해서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겨서이다. 특히, 아브라함이 바로에게서 엄청난 재물을 얻어 나올 때(창 12:16) 롯도 그 옆에서 상당한 반사 이익을 얻었거나, 아브라함이 얻은 재물의 일부를 분배받으며 덩치를 키웠을 것이다. 창세기 13장 5절에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라고 명시된 것은 그가 독립된 자본을 가진 세력임을 보여준다.

두번째 이유는, 아브라함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 있다며 아브라함을 따라 가나안으로 왔지만 거기에서 기근을 만난다. 그때 롯은 ‘약속의 땅이 왜 이래?’라며 하나님에 실망하고 아브라함에 대한 불신이 싹텄을 것이다. 거기에 숙모(사래)를 파라오에게 넘겨주는 모습을 지켜보며 ‘도대체 이 사람을 믿을 수 있을까?’라는 회의가 커졌을 거다. 위험하다고 자기 아내를 버릴 인간인데, 다음 번에는 나와 부족을 버리지 않겠느냐는 거다.

그래도 한 몫 잡았으니, 결과적으로는 나쁠 것 없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가나안 광야로 다시 돌아간다. 이집트의 풍요를 눈으로 확인한 이후에, 가나안 광야는 더 이상 비전이 없는 곳처럼 보였을 것이다. 롯이 보기에 소돔과 고모라는 새로운 기회의 땅이었고 큰 이윤을 낼 수 있는 투자처였다. 그러니 롯은 자신의 투자 감각을 믿었던 거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창13:10)

세번째 이유는, 후계자 후보에서 탈락했기 때문이다. 처음 하란에서 나올 때만 해도, 아브라함 가족은 ‘삼촌 잃은 시조카를 우리가 거두어야지.’라는 도덕적 의무로 롯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창12:2)’의 약속의 말씀을 듣고 난 이후에는 ‘어? 아브라함이 큰 민족을 이룬다면, 롯은 후계자가 아니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롯도 마찬가지로 ‘삼촌과 같이 있으면서 경영을 잘해도 삼촌에게 아들이 태어나면 내 몫은 없겠다’는 결론에 이르렀겠지. 라반은 외손주들도 챙겨주지 않았는데 외할아버지와 외손주 사이에 비하면, 삼촌과 조카 관계는 거의 남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롯의 삶은 성공적이었나

소돔으로 들어간 롯은 자신이 꿈꾸던 삶을 살았을까. 누가복음의 탕자는 허랑방탕하게 재산을 허비하다, 돼지치기로 연명하다 결국은 아버지에게 돌아온다. 롯은 누가복음의 탕자에 비하면 훨씬 더 자신의 재산과 삶을 잘 경영했던 것 같다.

창세기 19장 1절에 보면 롯은 성문에 앉아있었다. 고대 근동 사회에서 '성문'은 아무나 앉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성문은 그 도시의 재판이 열리고, 상거래가 이루어지며, 행정을 처리하는, 오늘날로 치면 '시청'이나 '법원' 같은 곳이다. 그가 성문에 앉아 있었다는 것은 그가 소돔이라는 도시 문명에 정착했을 뿐만 아니라 '주류 사회의 일원(유지)'으로 인정받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어느 정도 성공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위기의 순간에 소돔 사람들의 본심이 터져 나온다. "이 자가 들어와서 거류하면서..." (창 19:9) 그들은 롯을 여전히 이방인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롯은 그들에게 동화되려 했고, 딸들을 그곳 남자들과 정혼시킬 정도로 섞이려 했지만, 정작 결정적인 순간에 아무런 영적 권위도, 도덕적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했다. 심지어 예비 사위들조차 롯의 경고를 '농담'으로 여길 정도였으니까(창 19:14). 이것이 그의 성공이 얼마나 표면적인 것이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다.

롯만큼 성공한 사람도 되지 못하는 나는, 아무에게도 영향을 주지 못하는 사람으로 남아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된다.


아브라함은 롯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생살이가 다 그렇듯, 롯에게도 불가항력적인 재앙이 두 번 닥친다. 그리고 그 재앙 속에서 아브라함은 롯에 대한 헤세드(인애, 사랑)를 보이고 있다.

첫째는 그돌라오멜이 자신의 동맹군을 데리고 조공국가의 반란을 진압하러 나선 것이다. 이때 아브라함은 위험을 감수하고 주변 동맹군들을 모아 추격, 분진, 야습, 각개격파의 고도의 군사 작전을 펼친다. 이집트 파라오 앞에서 벌벌 떨며 사래를 바치던 사람과 동일인이 맞는지 믿기지 않을 정도의 정교하고 과감한 특수 작전이 가능했던 것은 롯에 대한 사랑이 아드레날린을 폭발시켰기 때문이다.

그런데, 롯의 반응은 아브라함의 기대와는 달랐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위험을 감수하고 롯을 구해주었건만 롯은 자기 재산을 챙겨 다시 돌아가 버린다. 아브라함이 허탈감을 느꼈다는 말은 묘사되지 않지만 하나님과의 다음 대화를 통해 아브라함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것이니이다 (창15:1-3)

하나님의 약속은 진공 상태에 나온 것이 아니다. 후계자가 없다는 허전함을 거듭해서 이야기를 하며, 이제는 가신 엘리에셀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는 수밖에 없다며 푸념하는 것에 가깝다.

두번째는 하나님의 천사가 소돔을 멸망시킬 때이다. 이 때, 아브라함은 롯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중보를 한다. 많은 설교에서 ‘왜 아브라함이 마지막 한 명까지 중보를 하지 않았느냐’며 아쉬워하지만, 아브라함은 롯 부부와 딸, 사위, 딸린 종들을 생각하면 10명까지 중보하면 롯의 가정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 아니었을까. 물론, 당시에는 이스마엘이 태어났으며 이삭이 태어날 것이라는 공표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롯에 대한 마음이 남아 있었다고 보인다.


롯은 왜 아브라함에게 돌아가지 않았을까

이 질문은 롯이라는 인물의 비극을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 조각이다.

먼저는, 돌아갈 면목이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고대 근동 문화에서 '체면'과 '명예'는 목숨만큼 중요했다. 창세기 13장에서 롯은 눈에 보이는 비옥한 땅(소돔)을 먼저 선택해서 당당하게 나갔다. "삼촌, 저는 제 식대로 성공해 보겠습니다"라는 선언이겠지. 그런데 아내는 죽었고, 재산은 불탔으며, 딸 둘만 데리고 빈털터리가 되었다. 롯의 자존심상, 실패자의 모습으로 삼촌의 텐트에 들어가 "밥 좀 달라"고 하기에는 죽기보다 싫었을 거다.

"후계 구도" 문제 또한 매우 현실적인 장벽이다. 소돔 멸망 직전, 하나님은 "내년 이맘때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공표하셨다. 즉, 아브라함 캠프는 지금 '친아들(적자) 탄생'을 앞두고 축제 분위기이거나 초긴장 상태다. 또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이스마엘조차 내쫓을 만큼(창 21장) 아들의 상속권에 민감했다. 그런데 다 큰 조카 롯이 돌아온다? 사라는 롯을 잠재적인 '상속권 경쟁자'로 보고 결코 반기지 않았을 것이다. 롯도 이 살벌한 '가문 내 정치 공학'을 알았기에 감히 갈 엄두를 못 냈을 것 같다.


롯이 될 것인가, 탕자가 될 것인가

만약 롯이 자존심을 꺾고 돌아갔다면, 아브라함은 받아주었을까. 아브라함은 롯을 위해 전투를 벌였으며 하나님과 6번이나 줄다리기 협상(50명~10명)을 했던 사람이다. 재산을 주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가족(식구)'으로 품어주고 먹여 살리기는 했을 거다.

하지만, 롯은 아브라함에게 돌아오지 못했다. 누가복음의 탕자는 철저히 실패했기에 돌아올 수밖에는 없었지만 창세기의 탕자(롯)는 애매하게 성공을 맛 보았기에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누가복음의 탕자는 ‘종’이라도 되겠다는 각오가 섰지만, 창세기의 탕자는 계산할 것이 많았다. 그는 세상의 계산법(이익과 손해)에 익숙한 사람이었기에, 삼촌도 자신을 '짐덩어리'나 '경쟁자'로만 볼 것이라 지레짐작했을 것이다. 사랑을 믿지 못하는 것, 이것이 롯의 가장 큰 비극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는 빛이 있는 '아브라함의 텐트'가 아니라, 어둠침침한 '산속의 굴'을 택한다(창 19:30). 굴은 '자궁'이자 '무덤'의 메타포로 읽힌다. 그는 세상이 무서워 다시 어머니 뱃속 같은 폐쇄된 공간으로 숨어버린 것이다. 문명(소돔)을 가장 좋아했던 사람이, 문명이 완전히 차단된 원시적인 굴로 들어가 생을 마감한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이 글을 쓰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실패한 자신을 안고 사랑의 관계로 돌아갈 용기가 있는가. 아니면 체면과 계산을 핑계로 혼자만의 동굴 속에 머물고 있는가. 실패한 자신조차 사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끝내 믿지 못하고 굴 속에서 또다른 재앙을 잉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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