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아산의 아브라함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는 순간이며, 믿음의 조상이 되는 사건이다. 헌신 예배에서 많이 인용되는 본문 중의 하나이지만, 창세기 22장은 늘 삼켜지지 않는 가시와 같은 본문이다. 지금도 삼킬 수 없는, 목에 걸린 가시 마냥 따끔하고 불편한 부분이 있다. 그래서 창세기 22장을 읽으며 갖는 질문을 중심으로 묵상해 본다.
헌신예배의 단골 메뉴인 이 본문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가장 첫번째 질문은 하나님은 왜 반문명적인 '인신제사'를 명했냐는 것이다. 인신제사는 하나님 당신이 금지하신 제사가 아닌가.
사실, 인신제사라는 것은 인류 문명 초창기에 흔하게 나타난 제의(祭儀) 방식이었다. 은나라,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문명, 잉카, 마야 문명 등 - 제단을 사람의 피로 물들이지 않고 시작한 문명은 없었다. 그리고 인신제사의 제물들은 대개 전쟁포로, 반역자, 노예들이었다. 다시 말해 인신제사는 내외부의 잠재적인 위협세력을 진압했던 수단으로 행해졌을 것이다.
그러면 고대 히브리인들의 신앙관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은 인신제사를 요구하시는 분인가? 후대 율법에서는 인신제사가 강력하게 금지된다. 레위기 18:21 – “너는 결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하게 하지 말라” 신명기 12:31 – “그들은 자기들의 신들에게 심지어 자기 자녀를 불사라 바쳤느니라. 나는 이런 일을 싫어한다.” 예레미야 7:31 – “그들이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 바알의 산당을 건축하고 자기 자녀들을 불에 태워 번제물로 바쳤으니… 나는 그것을 명령하지도 아니하였고, 뜻하지도 아니하였노라.” 등. 하나님의 계시는 점점 더 분명하게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을 뒤집어 생각해보면 - 굳이 성문화(成文化)시켜 금지했다는 것 자체가 그때까지 인신제사가 행해졌다는 반증이다. 그 근거로 사사기 11장에는 입다가 잘못된 서원으로 자신의 딸을 야훼께 제물로 바치지 않은가. 더구나 아브라함은 유대교의 시조로서 당시에는 종교적인 계율이던가, 예배 형식이 자리잡기 전이었을 것이다. 창세기 22장 이전에는 ‘인신제사를 드리지 말라’는 명령이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인신제사의 문화가 완전히 낯선 것은 아니었다.
요약하자면,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요구는 당시의 문화적 배경에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요구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아브라함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최고의 헌신'의 문법을 사용하셨다고 보는 게 맞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자신의 '전부'를 바치는 행위는 인신제사, 곧 독자를 바치는 행위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나님은 인신제사를 명하셨으나, 완수 직전에 이를 중단시키셨다는 것 또한, 인신제사를 금지하는 최초의 강력한 행동 계시다.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인신제사를 요구하는 이방 신들과 달리, 당신은 인간의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께서 제물을 예비하시는 신임을 선언하고, 후대 율법이 성문화되기 전에 그 행위 자체를 근본적으로 거부하셨다.
사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종을 바치라고 했다면 아브라함은 종을 죽여 바쳤을 것이다. 더 끔찍하 방법으로 제사를 요구하셨어도 따랐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제물을 ‘어떻게’ 드릴까, 하는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제물로 드릴까 하는 문제이다. 왜 하필, 사랑하는 아들 - 그것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 이삭을 달라고 하셨냐는 거다.
아브라함에 있어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은 매우 모순적이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 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하나님이 이삭과 언약을 세운다고 해놓고서는 이제 와서 이삭을 죽여 바치라고 한 것은 아브라함과 한 약속을 어기는 것이다. 그에 앞서, 천륜으로도 못할 짓을 시키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은 이 제물을 일컫는데 있어 매우 힘을 주어 강조한다. “Take your son, your only son - yes, Issac, whom you love so much…-네 아들을 데리고, 네 독자 말이다, 그래, 네가 그렇게 사랑하는 이삭을 취하라” 세 번씩이나 '이삭'이라고 확정한다. 그냥 '네 아들'이라고 하면 이스마엘도 해당되니까, 다른 선택으로 피해가지 못하도록 이삭을 콕 집어 말한 것이다. 이스마엘로 바꿔치고는 나중에 딴 소리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참, 지독한 하나님. 피해갈 수 없는 대답을 하게 만들고야 마는, 타협의 여지를 주지 않는 냉정하신 분.
이 강조는 아브라함에게 자신이 무엇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지를 직면시키는 방식이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에게 가장 아픈 곳, 가장 중요한 대상을 짚으시는 것이다. 이삭은 단지 아들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약속’, 미래, 정체성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한 페이지이지만, 창세기 21장과 22장 사이에는 십수 년의 시간차가 존재한다. 이삭이 자라는 그 십수년 동안,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관계는 차츰 소원해지지는 않았을까. 소원해진 관계에 대한 섭섭함 때문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가장 사랑하고, 가장 의지하는 것을 빼앗으려고 했던 것일까.
그렇다고 해도 하나님이 사람을 향해 질투를 한다는 개념 자체가 좀 치졸하게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나님 당신이 약속하셔서 주신 아들인데 좀 사랑할 수도 있지. 너무 박정하게 구는 것은 아닙니까.
하긴, 하나님은 성경에서 종종 ‘질투하신다’는 표현으로 묘사된다. “너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니라.” (출애굽기 20:3–5) ‘질투’라는 낱말이 주는 어감 때문에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적인 감정의 치졸한 형태라기보다, 관계의 전적인 헌신을 요구하는 언약적 표현이라고 봐야한다. 남녀의 언약, 부모와 자식의 신뢰, 그처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적 사랑은 중간이 없다. 하나님은 그것을 ‘질투’라는 강렬한 언어로 표현하신 것이다.
그래도 ‘질투’라는 말의 어감 때문인지, 반감이 가시지는 않는다.
상식과 논리로도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언행불일치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성경은 이렇게 기술한다. Some time later God tested Abraham’s faith. 사실, 나는 이 표현이 더 마음에 들지 않을 뿐더러 믿음을 시험-test'한다는 정확한 의미를 잘 모르겠다.
철없는 연인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일부러 위험에 빠진 척, 다른 사람 생긴 척 하는 - 그런 치기어린 심리테스트 같은 건가? 그런 수준으로 해석한다면 하나님을 너무 저급한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 같기는 한데 tested라는 낱말이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인상을 심어주는 듯하다.
나는 이 본문을 해석하는데 있어 '나를 공경한다는 증거로 네 아들을 죽여서 바쳐.'라고 윽박지르는 듯한 하나님의 이미지를 입히는 것에 대해 상당한 거부감을 느끼고 있다. 아울러, 헌신예배에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에 우리는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는 제목으로 선포되는 말씀에 대해서도 - ‘저 목사님이 성도들 주머니를 얼마나 털려고 저러시나’ 하고 다소 불경스러운 알러지 반응을 보이고는 한다.
요즘은 멜로 영화에도 '내 죽음으로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을 증명해 보이겠소.' 라는 내용을 넣으면 욕 먹는다. 느와르 영화에 '나는 네가 우리 조직의 배신자가 아닌지 의심스럽다, 네 아들을 죽여 네가 변절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봐라.'는 클리셰도 식상하다. 아, 역사적으로 그런 일이 있기는 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동맹이었던 오다 노부나가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아들인 노부야스를 할복 시켰다고 한다. 사돈(아들 노부야스의 처가)이 오다 노부나가의 적군이었더라나.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에게 전적인 사랑을 구걸하시는 분도, 피도 눈물도 없었던 전국시대의 패자와 같은 분은 아니 않는가. 아브라함은 아들을 죽여 자신과 가문의 안위를 유지해야 했던 도쿠가와인 셈인가? 그런 하나님라면 두려워할 수는 있어도 과연 사랑할 수 있을까.
한편, 후대에 씌여진 고대 유대 문헌에서는 이 시험이 사탄이 하나님을 충동하여 시행된 것이라고 기술하기도 한다. 이런 설정, 익숙하지 않은가? 바로 욥기 1장 6절에 묘사된 장면과 비슷하다. 이런 기술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고 하나님을 변호하기 위한 해석이라고 보여진다. 물론, 이런 각색은 하나님을 줏대없고 우유부단한 존재로 그린다는 또 다른 모순을 낳는다.
또한, 이러한 가설은 아브라함과 욥에 주어진 시험(test)은 곧 하나님과 사탄의 내기가 되는 셈이며 인생은 모두 하나님과 사탄이 두는 장기판 위의 말이 되는 셈이 된다. 결국, 인간의 자유의지와 운명 사이의 지난한 줄다리기일 뿐.
이 본문에 대한 고민이 여기까지 번지는 순간, 아차… 싶었다. 지금의 나로서는 감히 열어볼 수 없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는 낭패감과 함께 너무도 심오한 질문 앞에 눈앞이 빙빙 도는 것을 느낀다.
인류가 수천 년 동안 쌓아온 철학, 정치, 윤리, 종교로도 풀지 못하는 - 인간의 자유의지와 인간의 한계 사이의 딜레마에 대한 질문이니 말이다. 반대로 말하면, 하나님의 이 요구는 인간의 근원에 대한 문제와 닿아있지 않은가. 우리는 '자유의지'를 가진 역사의 창조자인가, '필연의 쳇바퀴'에 걸려 돌고 있는 장기말에 불과한 것일까. 나는 하나님이 왜 인신제사 - 그것도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죽여 드리는 인신 제사를 명하셨는지 아직까지는 명확하게 알아내지 못했다.
다만, 하나님이 피조물들의 고통을 보고 즐기시는 새디스트가 아니며, 무소불능하신(Almighty) 분이라는 전제 하에서 말하자면 - 그건… 피조물의 숙명이 아닐까,는 생각이 든다. 결국, 모리아산의 헌신은 '상실'에 대한 이야기이며 인간의 한계에 대한 인정이 아니었을까. 아무리 어렵게 얻은 아들이라고 해도, 아무리 소중한 것이라고 해도 언제든 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엄정한 진리 앞에 무릎을 꿇은 사건. 야곱이 하나밖에 남지 않은 라헬의 흔적 - 베냐민을 이집트로 보내면서 '자식을 잃게 되면 잃게 되는 것이지' 했던 말처럼 소중한 것으로부터의 집착을 놓는 것도 피해갈 수 없는 숙명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살아가다보면 사랑하는 것을 놓아야 할 때가 얼마나 많았던가. 짝사랑 때문에 아파하던 시절의 이야기는 추억에도 끼지 못하는 유치한 놀음에 지나지 않는다. 기회를 잃어버리고, 꿈을 잃어버리고, 사람과의 관계를 잃어버리고, 심지어 자식을 잃어버리는 고통 앞에서는 말이다. 사랑하는 무엇인가를 놓아야 하는 모든 사람은 모리아 산의 아브라함이다. 대상에 대한 사랑이 클수록, 대상이 소중할수록 모리아 산의 제단에 가까이 있다. 그리고 당신이 잃었던 모든 것은 제물이었고 상실의 과정은 당신이 드리는 제사였던 것이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의아할 정도로 대단하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모리아 땅으로 갈 채비를 마친다. 고민하지 않는다. 하긴, 고민할 시간을 두면 더 하기 힘들어질 것이다. 하지만 잔인하게도 아브라함에게는 고민할 시간이 사흘이 더 주어졌다. 모리아 땅까지 가는 사흘 내내 아브라함의 마음은 지옥이었을 것이다. 모른 척 돌아갈 것인가, 이삭을 놓아주고 도망치라고 할지, 별의 별 생각이 밀려오지 않았겠는가. 하루에도 수십 번 호떡 뒤집듯 생각이 바뀌지 않겠는가. 차라리 이삭이 눈치를 채고 도망갔으면, 하는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나는 이미 여호와와 언약을 맺어 저항하지 못하지만, 너는 자유롭게 도망치거라. 하지 않았겠는가.
사흘 길이 떨어진 곳에서 아들을 죽여서 바치라는 말은 '내일 아침 당장, 죽여서 내게 바치라'는 것보다 더 잔인한 명령이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계기는 이삭을 바친 사건이라고 하지만, 내가 봤을 때 모리아 땅까지 가는 사흘 길, 온갖 변명과 회피와 타협의 기회를 넘어야 했던 시간이야말로 최고의 순종을 드린 순간이라 생각한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묶고 죽이려던 그 순간에만 시험을 치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청천벽력과 같은 요구를 듣는 순간부터 아들의 가슴에 칼을 겨누기까지의 그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낸 것, 자신의 결심을 끝까지 꺾지 않고 실행하기까지의 그 사흘을 버틴 것으로 그는 자신의 믿음을 보였다고 생각한다.
모리아 산에서 왜 이삭을 드리라고 하셨는지 아직 정확히 잘 모르겠다. 가장 많이 듣는 설명은 예수의 대속을 예표한다는 말이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 신앙이 없는 사람이나 시험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납득이 가지 않는 설명이다. 뭐랄까, 성경이 너무 조직적으로 씌여졌다? - 너무 깔끔하게 앞뒤가 맞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오히려 믿음이 가지 않는다. 모든 것을 상징이고 예표라고 이야기한다면 관념 속에 갇히는 기분이다. 성경의 모든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간의 역사성과 드라마는 부정되고 예수님의 구속의 교리를 구축하는 - 하나의 상징이나 신화소로 이용되는 기분이다.
나는 이제 ‘이삭은 예수의 예표’라는 말만으로는 위로받지 못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한 명의 아비로 얼마나 괴로웠을지, 이삭이 한 사람의 아들로서 얼마나 얼마나 두려웠을지 생각한다. 그 이야기에서 교리를 찾기 전에, 먼저 살을 입은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싶다. 하나님은 왜 상징이 아니라 고통을 통해, 고뇌하는 사람들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셨는가. 그 질문 앞에서 나는 다시 믿음을 시작한다.
창세기 22장은 단순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가장 좋은 것을 줬다 빼앗으며 희롱한 사건이 아니다. 모든 사랑이, 모든 성취가, 모든 기쁨이 영원할 수 없음을 아는 것. 그리고 그 덧없음 속에서도 ‘주신 분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신 분도 하나님’임을 인정하는 사건이었다.
나는 "만약 이삭이 죽더라도 하나님이 그를 되살려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는 히브리서의 해석(11:19)은 결과론적인 해석일 뿐이라 생각한다. 당시의 아브라함이 그런 것을 계산할 정신이 있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아브라함은 그 순간 신학적으로 계산된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내면에 있는 절대적 존재에의 순종 본능에 따라 아들을 죽여서 드릴 생각이었다. '믿음의 조상' 운운하는 허명을 얻기 위해서도, 이삭을 대체할 후계자를 얻기 위해서도 아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의 순종은 ‘보상을 바라지 않는’ 순종이었고 이삭을 내려치기 전까지의 모든 시간이 순종이었다.
이야기는 모두가 아는 것처럼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시험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하고 이삭은 살아남는다. 다만, 제사는 취소되지 않았다. 제물이 바뀌었을 뿐이다. 이삭이 죽어 있어야 할 곳에 양을 두었다. 대속의 의미이다.
이삭은 불타는 양을 보면서 불 속에 누워있을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을 것이다. 각을 떠 벌여놓은 양고기를 볼 때면 창자를 내놓고 사지가 찢긴 채 죽어있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제 인신제사를 하는 종교는 거의 사라졌다. 아브라함은 이삭 대신 양을 잡아 바쳤고 제갈공명은 강을 건너기 위해 남만 사람의 머리 대신 만두를 빚어 바친다. 이제는 제관이 직접 제물의 피를 뒤집어 써 가면서 제사를 드리지도 않고 시장에서 제물을 사서 제사를 올린다. 돈이라는 경제적 매개체가 하나 더 끼어든 것이다. 심지어 이제는 얼마간 돈을 꺼내 봉투에 담아 내는 것으로 갈음한다. 신과 제관 사이에 제물이 끼어들고 다시 제물과 제관 사이에 재물이 끼어들면서 제물과 제관 사이의 일체감은 차츰 더 흐려지고 제사는 형식화 되어간다.
하지만 제물은 나를 대신할 뿐, 제단에 올라가야 하는 것은 사실, 나 자신이다. 자신의 몸을 태워드리는 소신공양으로 등신불을 만들었다는 불교 고승들의 헌신이 이런 헌신이다. 거기에 비해 우리의 예배는 너무 값싼 것이 되어 버리진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