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맹이 속 알맹이

by 어쩌다보니

20대 초반이 지나, 이제 ‘ㅅ’ 이 들어가기 시작하는 나이. 20대 중반으로 들어서지만, 머리로는 애써 부정하는 나이의 한 소년이 있었다. 그 소년은 같은 공간에 살지만 다른 시간에 살고 있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는 글쓰기와 일탈을 즐겨했다. 물론 일탈이라 해도 다른 사람들이 일할 때 그 풍경을 보며 한 숨의 여유를 즐기는 것 뿐이긴 했지만. 그 일탈은 그에게 약간의 영감을 주었고, 그의 머릿속에 한 켠의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누구든지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여야 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이다.’

사실, 그 소년은 이 문장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당연한 말로 받아들일 뿐, 딱히 이에 대해 더 생각하지도, 생각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은 그에게 새로운 것을 알려주고자 한다.


‘스스로 알을 깨면 병아리가 되지만, 남이 깨주면 계란 프라이가 된다.’ - J.허슬러


사람들 마다 각자의 알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알의 존재를 알기 위해서는 외부에서 두들겨줘야 한다. 세상이 그의 알을 두드렸다. 그리고 그는 그에 응답했다. 나라의 부름을 받았고, 그는 그에 따라 새로운 세상으로의 한 발짝을 새로 내딛었다.

하나의 세상을 알게되고, 그 세상을 깨기 위한 과정은 항상 고통스럽다. 그리고 알을 깨어나오는 과정이 고통스럽다면, 그 과정을 포기하고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러나 세상은 그가 안주하도록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규율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는 기존의 관념을 탈피하여야 했다. 처음 보는 천장, 처음 보는 사람들, 처음 보는 풍경. 이 모든 것들은 그에게 새로웠지만, 이는 곧 새로운 영감을 가져왔다. 나만의 세상에서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은 얼마나 많은지, 낮에 보는 햇빛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저녁에 보는 노을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물론 몸은 힘들고 고되었지만, 그의 정신만은 나날이 맑아졌다.

하지만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 이런 소소한 아름다움은 점차 무뎌지는 것이 당연한 법. 아침에 눈을 뜨고 밤에 다시 침대에 누워 암흑을 탐험하기 전까지, 그가 하는 일은 항상 동일했고, 몸과 정신은 이 환경에 적응해버렸다. 이 모든 것은 항상 당연한 것이고, 세상은 원래 언제나 똑같다. 반복은 나태를 낳는다. 새로운 영감을 얻을 곳이 없어진 그는 또 다른 곳에서 영감을 찾고자 하늘을 다시 올려본다. 이번에는 그에게 익숙한 밤 하늘이다. 검은 도화지 위에 반짝이는 흰 점들. 그리고 매일매일 모양이 바뀌는 흰 종이까지. 그의 세상에 있던 하늘과 달라진 것은 흰 점들이 더 많아졌다는 것. 그 점들을 바라보며 그는 큰 숨을 내쉬고는 하였다. 그리고 이 숨들은 하늘로 올라가 흩어지고, 그 흔적은 한때 붉었었던, 그러나 이제는 한 줌의 재가 되어버려 다시 땅으로 돌아가버린 채로 사라져버렸다.


새로운 사람들을 보내고, 다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 원체 내성적이었던 그 소년은 이런 경우를 많이 겪어보지 못했다. 항상 보던 사람들이 옆에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안정감을 느끼던 그에게 있어 빠르게 변하는 주변 사람들은 묘한 경계심을 주었다. 하지만 이 또한 어느새 일상이 되어버렸고, 이에 대해 딱히 여의치 않았다. 그는 이 사람들을 ‘잠시 지나가는 사람들’이라 인식하였음에 틀림없다. 형식적인 대화와 형식적인 공감. 그는 점차 다른 가면을 쓴 채로 살아가기 시작하였다. 짜증나는 일이 있어도 항상 웃으며 넘기고, 절대 싫증내는 법이 없는 그런 가면. 그의 내면은 그런 가면에 한 편의 공간을 내어주었다. 짧은 기간이지만 그렇다고 짧지만은 않은 기간동안 그 공간은 조금씩 조금씩 커져갔다.


어느덧 시간이 지나고 그는 잠시 몸 담고 있던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다시 그의 세상으로 돌아가게 되었지만, 그의 세상이 이전과는 달라졌다는 느낌을 크게 받았다. 그의 세상은 분명 넓어졌고,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자 한다. 그는 분명 새로운 환경에서 새롭게 적응을 해야 할 것이고, 또 새로운 영감을 찾고자 할 것이다.


파울리 코엘료의 ‘연금술사’에는 ‘무언가를 찾아 나서는 도전은 언제나 ‘초심자의 행운’으로 시작되고, 반드시 ‘가혹한 시험’으로 끝을 맺는 것이네.’ 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그는 ‘초원의 집’에 나오는 아버지마냥 이 말을 가장 좋아한다. ‘끝이 좋으면 다 좋아(All’s well that ends well).’


하나의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은 또 다른 알을 마주치게 되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알 또한 마트료시카처럼 다른 알 속에 들어있다.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서는 자신이 알 속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혼자서든, 타인에 의해서든). 이후에는 본인의 선택이다. 스스로 깨고 나올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타인에 의해 깨지는 경우도 생길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되었든 결국은 새로운 세상으로 한 발짝을 내딛게 된 것이고,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알을 어떻게 깨고 나왔는지 보다 이후에 어떻게 걸어가는 지가 그 다음 발걸음을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