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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선 Feb 24. 2024

단칸 월세방

지선

나는 내 방을 갖고 싶었다. 동생과 내가 각각 방을 가지고 화장실은 집안에 있는 빨간 벽돌집으로 만든 예쁜 집에 살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단칸 월세방이었다. 단칸방에는 화장실은 만들 공간이 없었나 보다. 화장실은 한 계단 내려가야지 갈 수 있었다. 나는 내 집이 싫었다. 친구들에게 보여 주기도 싫었고, 여기 살고 있는 내가 싫었다. 그 시절 경기가 안 좋은 만큼 내가 사는 집은 점점 더 작아지고 있었다.


내가 태어나 유치원 시절까지 살던 집은, 벽돌로 지은 단단한 집은 아니었었다. 방 1칸, 화장실 그리고  마루가 있었고, 여러 집이 붙어서 산 걸로 기억한다. 지금 생각하면은 판자로 만든 집이었던 것 같다. 그 집은 방이 넓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방에는 항상 나프탈렌 냄새가 났었다. 기억하고 있는 마당은 , 아주 넓은 공터였고, 그곳에 돌로 쌓은 담이 있었다. 꽃을 좋아하는 엄마는 주변에 꽃을 많이 심어, 마당이 화려했던 걸로 기억한다. 모두 그러했듯 장난감이나 간식거리가 없던 그 시절, 진달래도 따먹고 꿀이 나오는 빨간 꽃을 따서 빨아먹곤 했었다. 그 꽃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꽃을 따서 돌로 찢어 소꿉놀이도 하고 , 흙을 가지고 성을 쌓으며 놀았었다. 친구들과 논 기억보다는 항상 동생과 함께 놀았었다.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놀이이고 장난감이었다.


유치원에 가려면 긴 오르막을 걸어서 올라가야지 유치원 버스를 탈 수 있었다,  3살 터울이 나는 동생과 뜀박질을 해서 시간에 맞춰서 올라갔던 기억이 난다. 나는 유치원에 가지만, 유치원에 가지 못하는 내 동생은 항상 유치원 차량 앞에서 울곤 했었다. 지금 기억으로는  오르막을 오르고 나면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았다. 마음대로 넘어가면 안 되는 경계선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항상 생각했었다. '우린  다른 외딴섬에 살고 있는 걸까?'. 경계선 너머에는 놀이터도 있고, 슈퍼도 있고, 자동차도 다녔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 기억은 나쁘지가 않았다. 어린 나이이기 때문에 기억은 별로 없지만,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우리 엄마가 이 이야기를 들으면 많이 슬플지도 모르겠다. 항상 가난함에 해주고 싶은 거 다 못해주고 살아서 우리에게 미안해했었다. 엄마가 우리에게 최선을 다했음을 나는 안다.


내가 태어난 집은 그 시절 철거되어 큰 병원이 들어섰다. 아주 크고 좋은 종합 병원이다. 지금도 그 동네 대표 병원으로 위험 있게 우뚝 서 있다. 하지만 난 볼 때마다 마음이 아렸다. 내 집이 없어진 것 같았다. 내가 단칸 월세방으로 이사를 한 게 저 병원 탓인 것 같았다. 우리는 이사를 해야 했다. 거주지가 없어졌기 때문에 우린 보상을 받았다. 그 시절 그 보상금은 큰돈이었고, 살던 집보다 훨씬 좋은 집으로 이사를 했다. 1989년 내 나이 7살이었다. 내가 태어나 우리 가족 첫 번째 이사였다. 난 긴 오르막을 올라 언덕  끝 지점의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넘어오게 됐다. 그때의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난 분명 설레었을 것이다. 이사 온 집은 빨간 벽돌집으로 방이 2개, 화장실, 그리고 넓은 거실, 주방이 있었다. 예전 집과 똑같이 대리석 바닥으로 된 마당이 참 예뻤다. 엄마가 마당만 보고 집을 고른 건 아닌가?라는 착각이 들정도로 환했다. 예쁜 꽃도 있었고, 대리석으로 된 2층으로 연결된 계단이 있었다. 아래에서 본 2층으로 가는 계단은 천국으로 가는 계단 같이 환했다. 하늘과 맞닿아 있는 것 같이 보였다. 그 시절  내가 생각하는 2층집은 내 로망이었다.


 하지만 내 기억은 딱 거기까지다. 대문이 어떻게 생겼었는지, 현관은 어떻게 생겼었는지, 내 방은 , 부엌은 거실은 어떻게 생겼었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어떻게 놀았는지 내 방이 있었는지도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엄마가 찍어둔 사진으로 짐작해 보는 정도였다. 마당 안 예쁜 꽃 앞에서 동생과 찍은 사진이나 크리스마스 때 트리 앞에서 찍은 집안 내부 사진이었다. 예쁜 꽃과 트리사진으로 봤을 때 그 집에서 4계절을 보내긴 한 건가?라고 짐작해 본다. 사진으로 추억을 많이 만들려는 엄마는 사진을 많이 찍어 주었다. 다른 집보다 그 집사진이 많이 없는 걸로 봐서도 그때를 짐작하기에 충분했다.  우리는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우리는 번갯불에 콩 볶듯 급하게 이사를 했다.  첫 자두맛 사탕을 먹어서였을까? 그 뒤에 먹은 인삼 맛 사탕은 너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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