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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선 Feb 25. 2024

단칸 월세방

집은 가난했다

이때부터 집=가난이라는 수식어가 마음속 깊이 자리 잡았다.  단칸방은 방 1칸, 부엌이 있었다. 아빠, 엄마, 나, 여동생 넷이서 나란히 누우면 꽉 차는 방이었다. 화장실은 대문을 열면 왼쪽에 공동 화장실이 있었다. 집에서는 7개의 계단을 내려가야지 갈 수 있었다. 어릴 때는 저녁에는 화장실을 갈 수가 없어서 방안에 요강이 있었다. 화장실이 밖에 있었기 때문에 새벽에는 요강에 쉬를 눠야 했다. 그때는 뭣도 모르고 이상하지 않았던 사소한 일들이 내가 크고 자라면서 점점 막연한 부끄럼이 아니라 내 집이 내가 처한 상황과 환경이 너무 싫었다.


월경을 하는 날이면 엄마가 휴지 쓰는 게 아깝다고 신문지를 잘라서 줬었다. 춥고 재래식 화장실에서 패드를 갈 때의 기억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단칸 월세방도 싫었지만 화장실이 가장 싫었다. 방은 미닫이 문이었는데 미닫이 문을 열면 바로 부엌이었다. 부엌에서 문하나를 열면 바로 계단이었다. 작은 키였던 엄마가 서면 머리가 천장에 닿였다. 그곳은 부엌이자 욕실이었다. 우리 가족은 부산 사투리로 일명 대야에 물을 받아 세수를 했었다. 우리가 씻고 있으면 엄마는 같은 공간 그 옆에서 밥을 지었다. 매일 샤워를 하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거기서 4 식구가 살기에 아주 비현실적인 집이었다. 씻고 있는데 밖에서 누가 문을 두드리면 현관문을 열어 줄 수 없었으니 말 다했다. 추운 겨울날 수도가 어는 날이면 가스레인지에 물을 끓여서 씻어야 했었다. 주택은 수도가 어는 날이 많았다. 추운 겨울에 차가운 부엌 타일 바닥에 발을 딛고 부엌에 나가는 게 싫었다.  지금 사는 집 화장실 바닥에는 난방이 들어온다. 발바닥에 따뜻한 온기가 전해질 때 가끔 그 시절 화장실이 생각이 난다. 바닥은 따뜻하지만 그 시절 그 기억 때문인지 발끝에 전해지는 느낌이 머리끝까지 시려 오는 느낌이 든다.


좋게 생각하면 그나마 좋은 집에 살았던 기간이 짧아서였을까? 단칸 월세방도 금방 적응을 했었다. 중요한 건 단칸 월세방에 익숙해진 우리 가족은 환경에 만족했다는 점이었다. 무엇이 잘못된 건지도 모른 채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난 많은 시간이 흐를수록 '난 가난한 아이구나' 나 빼고 모두 잘 사는 것 같았다. 내가 생각하는 잘 살고 못 살고의 조건은 집이 되었다. 나에게 집은 그런 상징적인 의미가 되었다. 다른 친구들과 나를 스스로 비교했었다. 비교는 점점 더 우울해지고, 나를 불행하게 만들었다. 사춘기를 겪으면서 죽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 이사 갔던 그날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내 어릴 적 가장 불행한 기억이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의 기억은 나를 계속 따라다녔다. 철이 없었던 건지 아니면 철이 빨리 들었던 건지 잘 모르겠다. 부모님께 죄송하지만 난 어릴 때 많은 불안을 느꼈었다. 난 그 불안을 고스란히 가지고 성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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