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구점 글쓰기 모임
3월 12일 저녁 일곱 시, 해는 조금씩 하늘에 미련을 두었는지 집으로 돌아가길 거부하고 있었다. 나는 커피를 주문하면서 사장님께 일행이 더 올 거라 당당하게 말씀드린 뒤 4인석에 앉았다. 글쓰기 모임 약속 시간까지 한 시간 정도 남아있던 상황이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 커피를 기다리며 내부를 살폈다. 시야가 탁 트이는 통 창 너머로 연희동 104 고지가 보이는 전망 좋은 카페였다. 이런 곳에서 하루 종일 앉아 있을 수만 있다면 좋은 글이 써질 것만 같은 착각을 줄 만큼 내부는 훌륭했다. 나는 주문한 커피를 받아 들고 써야 하는 글과 쓰고 싶은 글 사이를 헤엄치며 시간에 굴복한 태양이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기던 바라보고 있었다. 해가 저물면 반가운 사람들이 속속 나타날 거란 기대를 품은 일몰이었다.
그러나.
해가 저물었음에도 누구 하나 나타나지 않았다. 당연한 결과였는데, 약속 날짜를 착각했기 때문이다. 약속은 내일 (13일)인데 오늘로 착각해 앉아 있던 것이다. 웃기고 앉았다는 누군가의 귓속말이 들렸다. 꼼꼼함 실패. 매번 무언가를 놓치는 헐렁함이 피곤해, 스케줄이 확정되면 곧바로 달력에 적어 놓았던 습관을 방어벽처럼 켜두었건만. 나란 놈은 디도스 공격처럼 내가 쌓은 담벼락을 일시에 구겨버렸다. 차가운 사실 앞에서 얕은 분노와 타들어가는 행복회로 앞에서 갈팡질팡 하다, 결국 별 수 없이 상황을 받아들였다. 이런 나와 평생을 살아가야 하니 빠른 수긍이 답이었다.
그러나.
내가 나를 용서하는 일은 쉽지만, 입장이 다른 타인은 상황이 달랐다. 그래서 특별히 상황을 설명하고 잘못을 시인한 뒤 용서를 구해야만 한다. 먼저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저녁 식사를 함께했을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고해성사했고, 내일 약속을 잡아 두었던 친구에게 백팔배를 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은 나를 어엿비 여겼고, 친구는 익숙한 일이라는 듯 다음 주 스케줄을 살펴보겠다고 했다. (한 P하는 내 친구. 역시 답이 없다.)
그래서.
어처구니없는 헛발질 덕분에 꽤 즐거운 하루가 완성되어 버렸다. 워낙 자주 있는 일이라 그다지 놀랍지 않은 것도 한 몫했다. 이럴 땐 원영적 사고, 럭키비키가 답이다. 나의 어처구니없는 실수 덕분에 이처럼 좋은 카페에 하루 더 올 수 있으니 좋은 일 아니겠는가. 꼼꼼함은 탑재하지 않고 태어난 덕분에 연희동 맛도리 청송함흥냉면에서 분주히 냉면을 빨아들이고 있는 사람들도 구경하고, 목란 보면서 이연복 아저씨 퇴근했으려나 상상도 하고, 봄 이 움트려는 연희동의 시간도 하루 먼저 보았으니 말이다. 그렇게 집을 싸고 돌아가면서 내일은 다른 길로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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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당일, 글쓰기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빵 터졌던 건 글쓰기 친구 1도 어제로 착각해 늦을 것 같아 카톡을 보내려 했다고 했다. 약속 시간이 다 와가는데 아무도 말이 없어 이상해 카톡창을 열어보고서야 날짜를 다시 확인했다고 한다. 친구 1도 달력에 적어두었다고. 이런 우연을 만날 때마다 세상에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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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수업은 형용사보다 단어 사용하기, 그리고 클라이맥스 ‘서대문구점집’ 당신의 인생사전계약은…?이라는 주제로 점 아닌 점을 봐주었다. 이 책 진짜 용하다. 돗자리를 깔았다면, 내 의상이 조금 더 컨셉추얼 했다면 그들은 나에게 복채를 내밀었을 것이다.
각자의 인생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내가 창조한 일은 무엇인지 미궁에 빠질 때쯤, 각자 글을 마무리한 후 해산했다. 그리고 다음 약속을 잡았다. 그때는 다시 한번 더 날짜를 확인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