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세이건의 말마따나 인간은 너무도 작은 존재이다. 우주라는 공간 속에서 그 크기도 그러하지만, 한 개인으로서의 정신력도 그러하다. 그토록 나약한 우리에게는 그래서 사랑이 필요하다. 이런 관점에서 볼때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우주의 광대함을 오로지 연약한 몸과 마음으로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 된다.
‘펀’은 남편을 잃은 후 유목민이 되어 작은 밴을 이끌고 세상을 떠돈다. 유목민들이 양에게 먹일양식을 위해 끊임없이 거처를 옮기듯, 그녀도 파트타임 일자리를 전전하며 생활비를 벌고, 다음 장소로 이동한다. 외롭고 불편한 삶이지만 그녀는 기꺼이 그러한 삶을 선택하고 나름의 만족을 느끼면서 살아간다.
그렇다면 <노마드랜드>는 집시적 삶을 찬양하는, 욜로 영화일까?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 작품의 주제를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노매드랜드>는 정착과 방랑에 대해 편드는 영화가 아니다. 떠도는 삶을 찬양하지도, 그렇다고 비하하지도 않은 채 그저 그녀의 삶을 한 꺼풀 벗겨내서 보여준다. 그녀가 겪는 사소한 기쁨과 슬픔을, 행복과 비참을, 그저 나열한다. 그것을 보면서 판단하고 해석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몫이다.
노마드(유목민)라는 노골적인 제목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삶의 방식에 대한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다. 처음에는 어떤 삶의 방식을 택할 것인가, 어떤 삶의 방식이 더 나은 것인가에 대해서 저울질을 해보게 되지만, 후반부에 다다를수록 그러한 고민 자체가 사라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남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이 낫지?’라는 질문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유목민임을 자각하는 단순한 깨달음이다.
그녀가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일하는 아마존 물류센터는 우리에게 두 가지 이미지를 상기시킨다. 대자연의 상징인 아마존, 대기업으로 대표되는 물질세계로서의 아마존이 그것이다. 그녀는 대자연을 떠도는 삶을 살아가면서도, 아마존 물류센터를, 코인 세탁소를, 병원을, 본가(언니의 집)를 왕래한다. 이 장면들은 어떤 인간도 더 이상 물질문명과 완전히 단절된 삶을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녀는 정착하지 않았을 뿐 물질문명으로부터 자유로운 유목민이라고는 볼 수가 없다. 그녀는 아마존과 아마존 사이를 부유하는 존재에 가깝다. 그렇기에 정착이 낫냐, 방랑이 낫냐는 질문은 그 자체로 성립하지 않는다.
<노매드랜드>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에 대해 생각해야 할까. 그것은 아마도 인간이 그 어떤 엄혹한 환경에서도 결국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 다시 말해 관계의 의미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
나는 ‘펀’의 삶을 따라가며 <그래비티>, <인투 더 와일드>, <코코> 같은 영화들을 떠올렸다. 이 영화들이 각각 우주, 야생, 사후세계를 배경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노매드 랜드>또한 방랑을 통해 관계를 말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녀가 관계 맺은 사람을 통해서 그녀의 모든 가치관과, 삶의 방식과, 행동들이 결정되는 것을 바라보았다.
태양을 돌고 우주를 항해하는 이 지구별에서 탑승하고 있는 모든 이들은 그 안에서 떠돌든 떠돌지 않든 이미 여행자이자 방랑자이다. 어둡고 차가운 우주에서 의미를 부여하는 유일한 존재가 인간이고, 그러한 인간을 규정하는 것이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것을 우리는 이렇게 훌륭한 작품을 통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