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를 욕망하는 것은 명예롭지 않다
영화 <그린나이트>
(스포일러 있음)
인터넷에서 ‘펀쿨섹좌’로 널리 알려진 일본의 환경성 대신 ‘고이즈미 신지로’는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긴 바 있다.
-기후변화에 대해서 Fun하고 Cool하고 Sexy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그게 대체 어떤 대처입니까?
-그걸 설명하는 것 자체가 섹시하지 않네요.
웃음이 터질 만큼 어이없지만 이 실소는 위기에 대처하자면서 대책이 없는 공직자의 모습에서 오는 것이지 ‘섹시함을 설명하는 것은 섹시하지 않다’는 말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이 말에는 일리가 있다. 섹시함에 대해서 구구절절 설명하는 행위는 섹시할 수 없다.
고이즈미 신지로가 영화 <그린나이트>를 보았다면 뭐라고 평했을까? 그는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명예를 욕망하는 것은 명예롭지 않네요."
영화의 도입부, 원탁의 기사들과 아서왕은 크리스마스 연회를 벌인다. 그저 왕의 조카일 뿐인 가웨인은 혈육이라는 초라한 자격으로 연회에 참석한다. 그는 이 사실이 못마땅하다. 자신은 기사가 아니고, 기사에 준하는 무용담도 없으며, 그로 말미암아 결정적으로 명예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웨인은 명예를 열렬히 욕망하게 된다. 기사답지 않은 본인의 행실에는 반성이 없으면서, 기사가 되지 못하는 컴플렉스는 가득하다.
때마침 그린나이트라는 불청객이 연회장에 등장한다. 녹색기사는 자신의 목을 베는 자에게 명예가 따를 것이라며 자신의 목을 벨 자가 있느냐고 도발하기 시작한다. 아무도 선뜻 나서지 못한다. 그의 목을 베는 데에 조건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목을 베는 자는, 1년 후 자신의 목을 그대로 바쳐야 한다. 오랜 정적이 흐른 후, 결국 나서는 이는 명예가 필요한 가웨인이다.
가웨인은 어떻게 했는가? 그린나이트의 목을 베어버렸다. 그는 왜 자신의 목을 내어주어야 한다는 점을 알면서도 그린나이트의 목을 베었을까? 그에게는 당장의 명예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린나이트와 가웨인의 견해는 여기에서 갈린다. 가웨인은 그린나이트의 목을 베는 순간, 자신에게 명예가 생겼다고 믿었지만 그린나이트는 가웨인이 1년 뒤 자신의 목을 바칠 때 명예가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명예'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명예란 무엇인가? 명예는 숭고한 희생의 결과물이다. 희생은 무엇인가? 모두가 바라는 쾌락을 기꺼이 포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때때로 명예는 변질된다. 희생(쾌락을 포기함)으로 인해 명예가 생기는 것인데, 명예라는 권위를 빌려 세속적인 이득만을 취하려는 경우도 생기는 것이다.
이는 우습다. 이순신이 함대의 가장 안전한 후미에서 싸우고 성웅이 될 수는 없다. 슈바이처가 대학병원 피부과에서 일하면서 노벨평화상을 받을 수는 없다. 화날 때마다 성질을 부리면서 교황이 될 수 없고, 훈련하지 않는 운동선수가 금메달을 딸 수는 없다. 우리는 평범한 이들이 해내지 못하는 희생을 온몸으로 실현한 사람에게 명예라는 무형의 권위를 선사한다. 세속적인 쾌락과 양립할 수 없는, 명예란 그런 것이다.
그런데 가웨인은 기사라는 타이틀을 그저 욕망하면서, 스스로 모순적인 존재가 된다. 길을 알려준 소년에게 인색하게 대했고, 보복을 받자 기사가 아니라며 목숨을 구걸했다. 목이 잘린 소녀(귀신)에게 댓가를 요구했고, 자신을 환대해준 성주를 배신했다. 모험 내내 그의 행동을 보면, 약속한대로 목을 바치고 진정한 기사가 되어 명예를 얻겠다는 결심이 없다. 그는 기사라는 명예를 '통해' 으스대고 싶어하고, 귀족 출신의 예쁜 아내를 얻으려하고, 왕좌에 오르려한다. 그러니까 죽을 수가 없는 것이다. 죽을 수가 없으니 진정한 기사가 될 수도, 진짜 명예를 가질 수도 없다.
<그린나이트>는 가웨인이 용감한 기사로 거듭나며 끝이 난다. 그는 죽음의 목전에서 자신의 미래를 본다. 진정한 명예 없이 그 과실만을 취하려 했을 때 벌어질 비극들을 상상한다. 꽉 쥘수록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가는 모래처럼 자신이 세속적인 욕망을 움켜쥘수록 그 모든 것들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그가 더이상 명예를 욕망하지 않을 때, 역설적으로 그는 용감한 기사가 될 자격을 얻는다. 서늘한, 도끼 내리치는 소리와 함께 영화는 끝이 난다. 목이 잘리고, 비로소 가웨인은 명예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