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에 시간이 겹쳐 있다는 것을 상상하면 기분은 썩 묘해진다. 옛 연인과 걸었던 길을 혼자서 걷고 있을 때 특히 그렇다. 같은 곳, 다른 시간. 달라진 건 우리의 관계 뿐이라는 생각이 들고. 아직도 저 앞이라든가 바로 뒤에 그때의 나와 그녀가 걷고 있을 것만 같다는 기분에 몸이 몇 번 부르르 떨린다.
공간은 매 순간 새롭게 갱신된다. 동일한 좌표평면에 수많은 역사가 중첩되어 있다. 내가 걷는 경복궁은 언젠가 조선의 왕들이 걸었던 곳. 과거의 그와 지금의 나를 분리하는 것은 오로지 시간이다. 내가 앉아있는 지하철 좌석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앉았을까? 공간에 새겨진 역사까지 생각하면 공간은 새삼스럽게 낯설고 새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라스트 나잇 인 소호>는 시골에서 상경한 엘리가 ‘소호’에서 겪는 초자연적인 이야기다. 억센 동기들과의 맞지않는 기숙사 생활에서 도피하고자 ‘소호’의 한 허름한 숙소를 얻게 된 ‘엘리’. 그녀는 낡은 방에서 1960년대 ‘샌디’의 역사를 환영으로 경험하게 된다. 엘리가 당도하기 이전의 역사가 현재의 순간에 겹쳐 나타난 것이다.
가수의 꿈을 안고 상경한 ‘샌디’에게 주어진 운명은 가혹한 것이었다. 그녀의 주변에는 약고 음흉한 남자들이 드글거렸고, 늪에 빠지듯 착취와 폭력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엘리’는 어머니의 영혼을 볼 수 있을 만큼 예민한 감성의 소유자로, 환영을 통해 ‘샌디’가 겪은 과거의 일들을 거의 자신의 체험으로 경험한다.
우리가 공간을 4차원으로 인식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익숙한 공간 속 숨겨진 역사를 온몸으로 실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비극에 가까울까 희극에 가까울까? 우디 앨런의 <미드나잇 인 파리>가 이러한 상상력을 재기발랄하고 유쾌하게 구현해냈다면 <라스트 나잇 인 소호>는 누군가의 상처받은 역사가 나의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모든 공간에는 그 공간을 살아낸 사람들의 무수한 안타까운 사연들이 녹아있을 수 있음을 우리는 쉽게 잊고 산다. 지나간 것은 덧없이 사라지고 피해자는 기록되는 법이 드물다. 공간은 매순간 갱신되고, 우리는 현재를 사니까. 전도서에 이런 말이 있지 않나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 우리는 과거를 잊은 채 현재를 살기에, 우리도 그렇게 잊혀질 것이라는 말. 동의할 수밖에 없다.
일면 우리 나라의 ‘아랑전설’과도 같은 이 이야기는 ‘아랑전설’과는 다르게 끝맺는다.
‘사또 억울하옵니다.’ 로 나타난 아랑이 자신의 한을 풀고, 평안히 사라지는 것과 달리 <라스트 나잇 인 소호>에서는 모든 이들이 자신의 죄값을 적절하게 치른다. 소호의 아랑 마저도.(정말로 공평하고 적절한가에 대해서는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피해자는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는 피해자가 되는 이 이야기는 끝내 그 누구의 편도 들지 않음으로써 균형을 지켜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좋아한다. <피터팬>, <침대귀신>, <폴라익스프레스> 같은 영화들. 잠자리에 든 주인공들이 또 다른 세계로 떠나고, 일대 사건을 겪고 복귀하는 이야기 말이다. 이런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들은 잠시 다른 세계를 경험했을 뿐이지만, 이전의 자신과 이후의 자신은 완전히 달라진다. 자신의 결함을 인정하고 극복하고 삶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원초적인 감동이 나는 이런 구조에 있다고 생각한다. 곱씹을 수록 진하다.
영화의 마지막, 엔딩크레딧에서는 ‘라스트 나잇 인 소호’의 노래와 가사가 나온다. 아무 생각없이 가사를 읽다 보면 이 오래된 노래의 가사가 영화의 내용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의 유쾌한 노래 가사가 이토록 끔찍하고, 슬프고, 감동적인 영화로 탈바꿈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나는 에드가 라이트의 귀신같은 솜씨에 박수를 칠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