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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서담 Oct 05. 2019

죽음을 들고 다니는 여행

유한함을 받아들이는 일에 대한 고찰

 7일간의 짧은 여행이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 
일주일 간의 짧은 생을 하나 마쳐간다.


 3일이나 4일이 남았을 때만 해도 이 휴가가 끝나간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새로운 말을 배우고, 음식을 주문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그저 눈 앞에 보이는 것을 즐기기 위해 집중하다 보니 남은 시간은 하루뿐이다. 6일간의 거친 일정은 몸을 끝까지 지치게 했지만 나는 하나라도 더보기 위해 몸을 다시 움직인다.


 걷는다. 빠르게 이동하기 위해 버스나 트램을 이용할 수도 있지만 산책을 선택한다. 딱히 아름다운 경치라고 할 수 없다. 그저 이곳의 사람들이 사는 평범한 주거에 평범한 풍경들이지만 무슨 말인지도 읽지 못하는 간판 하나에도 눈길을 준다. 내가 가야 할 곳이 몇 킬로나 남았는지 내가 몇 시까지 출근해야 하는지 약속시간까지 늦지 않으려면 내가 얼마나 더 빨라져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일상 속의 걸음과는 다르게 무엇 하나라도 더 보려 한다. 


 그렇게 나에게 주어진 단 하루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하나라도 더 이해하고, 하나라도 더 경험하기 위해 마음을 온전히 현재에 집중한다. 그것은 몸을 피곤하게 만들고, 완전히 방전된 느낌을 들게 하지만 적어도 이 짧은 7일간의 생을 제대로 살았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것이 끝나가기 때문이다. 유한하기 때문이다. 조금 있으면 이 짧은 하나의 생을 끝마쳐야 한다는 것을 인지하기 때문에 나는 이 시간의 진정한 가치를 제대로 받아들인다. 그렇게 이 짧은 여행이라는 하나의 주기, 혹은 하나의 삶을 제대로 살아낸다.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부터 이동이란 어딘가로 가기 위한 행위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회사에 가기 위해 전철을 타는 것이지, 전철을 타기 위해 전철을 타지 않는다. 하나라도 더 보기 위해 주위를 살피기보다는 하나라도 덜 듣기 위해 귀를 이어폰으로 덮는다. 조금 돌아가면 한가로운 길이 있지만 굳이 사람들이 붐비는 가장 빠른 경로를 택한다. 서로를 밀치며 한 명이라도 더 앞지르기 위해 어깨를 들이민다. 이것은 오직 어딘가로 가기 위한 행위일 뿐 조금이라도 감상하고, 경험할만한 것은 이곳에서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무실에 도착한다. 일을 한다. 일을 하는 것은 어떠한 결과물을 도출하기 위함이지 일하는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끼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일을 즐길 수 있는 인간은 'I Like This Job'을 외치는 조커뿐일지도 모른다. 13년 전 그저 좋아서 시작한 일을 여전히 하고 있지만 전공자가 아님에도 스스로의 힘만으로 이 일을 하게 되었다는 자부심과 파고드는 몰입의 즐거움, 열정이라 불릴만한 것들은 사라진 지 오래다. 일을 하는 것은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것이 성과이든 스스로의 만족감이든 별반 차이가 없다. 난 때때로 자신의 죽음을 모른 채 불빛을 향해 뛰어드는 날벌레처럼 일하게 된다. 시간은 투자를 해야 하는 자산이 되어버리고, 유유자적하며 시간을 보내는 일 따위는 할 수 없다. 그것은 죄악이다.


 여행에서 느꼈던 놀람과 지금 이 순간을 살았다라는 그 느낌은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사라진다. 그러다 문득 하나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인생도 매일 여행하듯 살 수는 없을까? 그 여행이 일주일이라는 유한함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 순간을 살게 된 것처럼 인생도 조금 긴 유한함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이 순간을 살 수는 없을까? 그렇게 된다면 지구별에 놀러 온 안드로메다의 외계인(겉모습은 인간과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처럼 매일을 놀라움과 창조적 발견 등으로 가득 채울 수 있지 않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행위는 때로 철학보다는 망상에 더 가까워진다. 스스로가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은 관념 상으로는 가능할 듯 하나 그것을 매일 몸으로, 손가락 끝으로 혹은 어떤 형태를 지닌 감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매일 아침 책을 읽으며 다짐하다가도 성과나 성취, 부자가 되는 일, 유명해지는 일 등이 인생이 전부라고 말하는, 그런 분위기의 견고하고 거대한 벽안에 단단히 구축한,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묘한 문화적 왕따가 될 수밖에 없는 사회에서 그렇게 살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미친 듯이 땀을 흘리며 운동을 하고, 샌드위치나 라면 같은 평범한 메뉴를 먹으며 이게 어쩌면 최고의 요리일지도 모른다고 느껴지는 순간, 발로 지도를 그리며 내가 사는 동네의 구석구석에 내 몸을 통과시키는 순간에는 어쩌면 난 제대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매일 마주치는 이 풍경을, 이 평범함 속에서도 나는 여행하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고 잠시 착각에 빠지기는 한다. 그러나 그런 기분은 오래가지 못한다. 


 답을 찾지 못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망상으로 치닫는 사색도 의미가 있을까? 우리 모두가 자신이 유한하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세상이 조금 더 아름다워질지도 모른다 하나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사람들이 무례해지는 것은, 남의 것을 뺏어서라도 괴롭혀서라도 자신의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이기심은 모두 뱀파이어처럼 영원히 살 수 있을 거라는 무한함에 대한 환상 때문이라고, 그러니 우리 모두가 한 번쯤은 자신의 유한함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한다는 망상.


 나는 그럼에도 의미가 있다고 믿고 싶다. 때로 그런 망상과 사색을 통해 조금 더 가까워진다고 느낀다. 실제로 나는 죽음에 매일 가까워지고 있고, 가끔은 아주 조금씩 삶을 살아가는 감각,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간다는 의미에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가까워진, 한없이 수렴하고 있는 상태라고, 그럴 수 있다고, 때론 믿고 싶다. 그 감각을 느껴보기 위해서라도 답이 없는 질문을 매일 같이 던져야 한다.


 인생도 여행하듯 살 순 없을까? 유한함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작은 가방에 챙겨 넣고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내가 걷는 모든 길이 내 길이며 내 정원이라고 생각하며 부정적인 경험이든 긍정적인 경험이든 최대한 모든 것을 느끼기 위해, 내가 살아볼 수 있는 모든 삶을 살아보기 위해 모든 것을 즐겨보기 위해 살아 보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미친놈처럼 'I like this job, I like this life!'라고 중얼거리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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