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서 자라는 작은 단단함
"단칸방"
단단해지기위해 난 오늘도 하루를 살았다.
좀 더 단단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 누군가는 여행을 떠나고 누군가는 책을 읽고,
누군가는 잠시 멈춰 서서 울기도 한다.
새벽 다섯 시, 어김없이 울리는 알람. 어둑한 골목을 지나 난 오늘도 출근을 한다.
빵집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따뜻한 기운이 고요히 흘러나온다.
조용한 적막속에 들려오는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 오븐 예열되는 냄새, 새벽 한 구석에서 켜진 작은 불빛.
그 순간만큼은, 아무도 나를 밀어내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일은 고되고 시간은 길었지만, 그 시간을 쌓아두니 어느새 ‘내가 다시 살아가고 있다’는 실감이 찾아왔다. 세상에 버려졌어도 새벽은 한 번도 나를 버린 적이
없던거 같다.
몸이 무겁고 아픈 날에도 손을 움직이면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작게나마 행복이란게 느껴진다.
정말 웃긴 일이지 않은가 내 나이 마흔다섯에 이 감정을 느끼다니 말이다.
어느 새 난 마흔 다섯의 중년의 아줌마가 되었고, 지금은 머리가 하얗고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치매 걸린
아버지의 보호자이고 아홉살 딸아이의 세상이다.
내 삶은 번번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국민학교에 입학하던 해였다.
나는 다섯살때 맡겨진 할머니 집을 떠나 처음으로 엄마 아빠와 함께 살게 되었다.
아빠의 친구를 따라 도착한 곳은 손바닥만 한 단칸방이었다. 대문을 열자, 갓난아기를 품에 안은
스물일곱 살의 엄마가 나를 힘껏 안아주며 반겨주었다. 1년만이었다.
엄마는 열아홉 어린 나이에 나를 낳았다. 그때의 엄마는 참 예뻤다.
동네 갓난 아이를 돌보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던 엄마의 얼굴엔 피로와 미안함,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던 세월이 함께 묻어 있었다. 그날부터 우리는 작은 방 한 칸에서 살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저 엄마 아빠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 좋았지만, 조금씩 그 방의 좁음이 마음에 그림자처럼 따라붙기
시작했다. 하굣길에는 늘 조용한 긴장이 있었다. 집에 가서 놀자는 친구들의 밝은 말이 귀에 닿는 순간,
나는 꼭 다른 길을 향해 발걸음을 돌리곤 했다. 집은 바로 코앞이었지만 나는 늘 돌고돌아 해가 지고나서야
집에 도착했다. 대문 안에서 버티고 있는 우리 가족의 모습이 누군가의 눈에 닿는 것이 두려웠다.
집이 부끄러운 게 아니라, 그 집이 너무 ‘나’ 같아서 더 숨기고 싶었던 것 같다.
우리의 단칸방은 계절을 막아주지 못했다. 겨울이면 바닥이 유난히 차가웠고, 창문 틈새로 바람이 들어왔다. 갓난아이의 울음과 엄마의 한숨이 얇은 벽지에 고였다. 엄마는 하루 종일 아이를 보며 지쳐 있었고
아빠는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눕기 바빴다. 나는 그 사이 좁은 틈에서 숙제를 하고, 밥을 먹고, 잠들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 방을 미워하지는 못했다.
비록 작아도, 그것은 내가 처음으로 ‘가족의 온기’를 배운 곳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작은 봉지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싹이 돋은 감자가 몇 개 들어 있었다.
엄마는 그것들을 벗겨 밀가루 반죽을 만들어 섞었다.
소금 한 꼬집을 넣는 손끝이 유난히 조심스러워 보였다. 그날의 소금은, 우리 집에서 가장 귀한 것이었다.
김이 펄펄나는 찜기위에달궈진 반죽이 떨어지자 부드럽게 익어가는 냄새가 좁은 방 안에 천천히 퍼졌다.
엄마는 작은 접시에 그것을 담아 내게 건넸다. 한 입 베어무는 순간, 감자의 달큰함이 입안에서 스르르 녹았다. 가난한 집의 음식이 아니었다. 그건 ‘엄마가 나를 먹이고 싶어 만든 음식’의 맛이었다.
그 맛은 지금도 나를 문득 멈추게 만든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이상하게 안도감이 있었다.
옆집에서 나는 냄새도 자주 나를 흔들었다. 형제가 많은 아주머니가 살던 방에서는 저녁마다 연탄불 위에
김 굽는 소리가 났다. 타닥타닥— 짧은 불꽃 같은 소리와 함께 고소한 기름 냄새가 골목을 타고 흘러나왔다. 나는 그 냄새가 너무 좋아 숨을 크게 들이키며 문틈에 서 있곤 했다. 어느 날 밤, 그 냄새는 유난히 진했다.
나는 조용히 옆집 찬장 앞으로 갔다. 문을 여는 순간, 어둠 속에서 김 봉투가 은빛으로 반짝였다. 손을 넣어 한 장을 꺼내는 동안 가슴이 쿵 내려앉는 소리가 들릴 만큼 긴장됐다. 달빛이 고여 있는 마당 한쪽에서 서둘러 김을 입에 넣었다. 바삭한 소리가 들킬까 봐 입을 꼭 다물고 천천히 씹었다. 김 조각이 혀에서 녹아내릴 때, 나는 처음으로 ‘맛있다’와 ‘미안하다’는 마음이 동시에 밀려오는 것을 알았다.
그 작은 김 한 장 속에는 배고픔, 욕심, 부끄러움, 그리고 생존이 모두 섞여 있었다. 그 밤은 내 어린 마음을
조용히 더 자라게 한 밤이었다. 어른들은 알려주지 않았지만, 나는 그 단칸방에서 숨기는 법을 처음 배웠던거 같다. 배고픔도, 창피함도, 서러움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법. 누군가와 나를 비교당하지 않도록 나를 조용히 감추는 법. 그 기술은 생존을 위해 어린 내가 스스로 익힌 방식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단칸방은 내 인생에서 가장 작은 공간이었지만 가장 큰 단단함을 준 곳이었다. 그때의 기억이 아무도 모르게 나를 일으키며 살아간다. 소리 없이, 그러나 분명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