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애

엄마의 집

by seodan

오랜만에 손녀를 보기 위해 엄마가 집에 오셨다. 하룻밤이라도 손녀와 함께 따뜻한 방에서 주무시고 가셨으면 좋으련만 엄마는 뭐가 그리 바쁜지 저녁만 드시고 집을 나선다. 엄마의 집으로...

그런 엄마를 보면서 난 가끔 엄마의 지난 삶을 한 장면씩 떠올린다.


엄마의 열아홉 그 시절,

그 소녀가 지나온 풍경을 마치 오래된 흑백사진처럼 난 가끔 눈앞에 놓고 본다.

산과 물이 어우러져 있는 엄마의 고향 단양, 풍경은 아름답지만 엄마가 자란 그곳은 늘 가난이 짙게 내려앉은 곳이었다고 한다. 앞마당엔 비만 오면 질척이는 흙과 자갈이 있었고, 내려앉은 지붕 사이로 햇빛이 비스듬히 들어오는 시골의 작은 흙 집. 엄마는 3남 3녀 중 둘째였다. 둘째인 엄마는 늘 양보가 먼저였고, 영애라는 이름대신 둘째, 또는 야라는 이름이 더 익숙했다고 한다.

소녀 영애는 자신보다 동생들 밥을 먼저 챙겼고 집 안 밭일로 몸이 성할 날이 없었다.

막내삼촌의 공부를 위해 엄마는 국민학교도 겨우 졸업했다. 꿈보다 생계를 먼저 배웠던 사람. 그 단양의 산과 강을 뒤로 두고, 엄마는 너무 일찍 어른이 되었다.

그런 집에서 엄마는 탈출구를 찾고 싶어였을까 엄마는 아빠를 만나 열아홉에 나를 낳았다.

친구들이 한창 수다 떨고 웃을 나이에, 엄마는 뱃속의 아기가 다칠까 배를 끌어안고 아기를 따뜻하게 누일 곳을 찾아다녔다. 할머니가 쥐여준 작은 돈으로 병원에서 아기를 낳고 퇴원하는 순간 문 밖에는 ‘집’이라는 공간 대신 세상의 차가운 시선뿐이었다.

갓난아기를 품고 병원 앞에 섰던 열아홉의 소녀. 그 어깨가 얼마나 무겁고 아팠을까...

지금의 내가 그 소녀였다면 난 어떻게 했을까...생각만해도 아찔한 순간이다.

아빠 친구가 운영하던 작은 공장의 작은 창고, 그 곳이 엄마의 첫 집이었다. 창고의 냄새와 엄마의 눈물...

그 창고는 기름과 철가루 냄새, 축축한 먼지가 뒤섞여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목이 칼칼해지는 곳이었다.

벽은 시멘트가 드러나 있었고, 겨울이면 바닥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엄마는 그 바닥 위에서 나를 안고 밤새 울었다고 했다. 갓난 아기는 배가 고파 울었고, 어린 소녀는 산후조리를 못해 젖이 돌지 않아 아기가 죽을까봐 함께 울었다.

갓 태어난 아기에게 입혀준 작은 배냇저고리. 하얀 면에 연한 노란 줄이 들어간 그 옷은 엄마가 가진 유일한 ‘깨끗한 것’이었다. 엄마는 그 배냇저고리를 먼지가 묻지 않게 조심스레 매만지며 나를 천천히 흔들어주었다고 했다. 스물두 살의 아빠 어른도 아이도 아닌 나이에 가장이 된 남자. 엄마는 말했다. “너희 아빠도 어려웠어… 그때는 정말.” 아빠는 창고 한편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비벼 끄며 “미안하다… 미안하다…” 그 말만 반복했다고 했다.

책임질 능력도, 세상을 알 경험도 없는 어린 두 사람이 울음뿐이던 아이 앞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늘 억척스럽고 고생을 달고 살았던 엄마. 나는 커가면서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평생을 상처를 삼키며 살아온 엄마, 엄마처럼 사람을 잘못 믿어 쓰러지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엄마처럼 자신보다 남을 먼저 챙기며 자신을 잃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엄마의 삶은 나에게 경고장 같았다. “이렇게 살지 말아라.” 그 외침이 마음에 깊게 박혔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깨달았다. 닮고 싶지 않았던 것들이, 내 안에 자리하고 있다는 걸. 사람에게 마음을 주는 방식, 상처받아도 스스로를 먼저 탓하는 습관, 힘들어도 “괜찮다”고 말하는 버릇. 엄마와 나는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사랑하고 슬퍼하는 방식은 엄마를 닮아 있었다. 하지만 엄마의 아픔만 닮은 건 아니다. 열아홉 갓난 아이를 위해 죽을 힘을 다한 소녀 영애의 힘도 닮아 있었다. 세월이 갈 수록 그 깨달음이 이해로 날 채운다. 영애는 완벽한 어른이 아니었다. 어른이 될 틈조차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 소녀가 나를 키웠다는 사실이 가끔 가슴을 아프게 한다. 엄마의 지난 인생은 바꿀 수 없지만 남은 인생만큼은 조금 덜 외롭고 조금 더 따뜻했으면 좋겠다. 엄마가 그렸던 소녀 영애의 집에서 말이다. 나는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았지만 엄마를 사랑하지 않은 적도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떤 모습의 엄마라도 나는 결국 엄마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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