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나의 장래희망은 수도 없이 바뀌었다. 가수가 되고 싶었다가, 잠시 외교관을 꿈꾸기도 했다. 그 외에도 아나운서, 공연기획자, 스포츠 구단 프런트, 라디오 PD 등 세상에는 궁금하고, 하고 싶은 일들이 참 많았다. 결국 희망 목록에는 없었던 스포츠 기자가 되었지만.
각양각색의 직업에는 얼핏 공통점이 없어 보이지만, 이제 와 되짚어보면 제법 비슷한 이유가 덧입혀져 있다. 모두 당시 내가 좋아하던 사람들에게서 비롯된 꿈들이다.
꿈을 열어주는 사람들
초등학생 때는 보아의 음악을 들으며 '가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들 앞에 나서길 싫어하는 지금으로선 상상도 되지 않지만, 그때는 소풍을 떠나는 학원 버스 안에서 마이크를 잡고 당시 히트곡인 NO.1을 부르기도 했다. 다시 생각해봐도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미처 오디션을 보러 가야겠다는 행동으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동방신기 앨범을 사면 그 안에 늘 오디션 안내 리플릿이 들어있었는데, 이걸 차곡차곡 모아두기만 했지 선뜻 용기를 내진 못했다.
중학생 때는 김주하 아나운서에게 푹 빠져 지냈다. 당연히 그를 따라 MBC 아나운서가 되고 싶었고, 3년 내내 방송반 생활을 했다. 내가 다닌 중학교에서는 걸어서 10분 거리에 MBC가 있었다. 그때는 목에 출입증을 걸고 방송국 안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어찌나 멋있어 보이던지. 은연중에 '어른이 되면 출입증을 찍고 들어가는 회사에 다니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그로부터 10여 년 후, 언론사에 덜컥 취직한 나는 잊고 지냈던 어릴 적 로망을 이뤘는데 실상은 자부심보다 번거로움이 훨씬 더 컸다.
고등학생 때는 또 다른 목표가 생겼다. 스윗소로우를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스윗소로우는 매일 밤 10시부터 12시까지 진행되는 SBS 라디오 텐텐클럽의 DJ였다. 학교-학원-독서실에 갇혀 지내던 내게는 유일한 버팀목이기도 했다. 특히 연세대학교 합창단 출신인 그들은 '엄친아'로서 학생들에게 동기 부여의 메시지를 한가득 심어주기로 유명했다.
오빠들에게 이름이라도 한 번 불려보겠다는 심정으로 매일같이 사연을 써서 올렸다. 부지런히 댓글도 달았다. 그러다 종종 나의 이야기가 전파를 타고 전국에 퍼지면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부분만 녹음해 몇 날 며칠을 돌려듣기도 했다. 이런 나에게는 연세대학교 진학, 공연기획자, 라디오 PD 같은 여러 갈래의 길이 열렸다. 사인회에 가면 오빠들에게 '나중에 꼭 같이 일하자'는 각오(?)가 담긴 맹랑한 제안도 곧잘 했었다.
이후로도 반기문 전 UN 사무총장의 책을 읽고선 '외교관이 되어서 남북통일에 기여하고 싶다'는 원대한 목표를 품었고, 그러다 프로야구와 프로배구에 온 마음을 빼앗겨 홀린 듯이 스포츠계에 발을 들였다. 돌고 돌아 뮤지컬을 보는 것이 하루하루의 낙이 된 요즘은 다시 공연기획자가 되고 싶다. 이렇듯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는 나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꿈들을 안겨줬다.
그들을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누군가의 팬이 되면 뜻밖의 경험도 참 많이 한다. 최근에는 언택트 시대의 흐름에 뒤늦게 올라탔다. 화상회의 앱인 줌(ZUM)을 이제서야 경험한 것이다. 뮤지션 장기하가 첫 저서인 <상관없는 거 아닌가?>를 발간하면서 랜선 팬미팅 자리를 마련했는데, 바로 줌을 이용했다. 그간 회사원 친구들이 줌으로 회의를 한다느니, 동생이 줌으로 학원 수업을 듣는다느니 하는 이야기만 들어봤지 내가 실제로 줌을 써보게 될 줄이야.
처음에는 모든 것이 어색했다. 그래봤자 80명 남짓한 사람들이 들어왔는데, 주인공인 장기하 작가와 참여자들의 목소리가 뒤섞여서 들리는 거다. 이쪽에서 장기하 작가가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으면 저쪽에서 '다음 정류장은 000입니다' 하면서 버스 안내 방송이 나오는 식이었다. 어느 집에서는 갓난 아이가 울고,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오디오를 통해 모든 이들에게 전해졌다. 그야말로 난리 법석 그 자체였다.
초반에는 장기하 작가도 크게 당황하는 듯했지만, 곧 서로가 줌의 사용법을 익히면서 팬미팅은 제법 원활하게 진행됐다. 좀 익숙해지고 보니 장점도 꽤 있었다. 실제 오프라인 행사처럼 작가가 참여자들의 표정을 시시각각 살필 수도 있었고, 특정인의 이름을 부르면서 '지금 화면 앞에서 뭘 먹는 거냐'고 물을 수도 있었다. 도중에는 케이크에 초를 붙여서 축하 노래를 다 같이 불러줬는데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앞으로 줌을 다시 쓸 일은 딱히 없겠지만 색다른 시도였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비슷한 일은 또 있다. 요즘 나의 최애 배우는 뮤지컬 <시데레우스>에서 케플러로 열연하는 기세중 배우다. 따뜻한 중저음에 시크하면서도 장난꾸러기 같은 반전 매력에 이끌렸는데, 그는 무대 밖에서 충실한 '집사'로 지낸다. 마초, 쫄보라고 불리는 치즈색 고양이 두 마리를 모시고 산다.
그는 가끔 인스타로 1~2시간씩 라이브 방송을 할 때가 있다. 이때 영상에 꼭 등장하는 게 두 주인님들이시다. 때로는 기세중 배우가 아예 화면에 나오지 않고 고양이들만 몇 시간씩 찍을 때도 있다. 마초, 쫄보가 주인인 인스타그램 계정까지 있다. 그리고 나는 꽁냥꽁냥 사이좋게 지내는 이들을 지켜보며 자연스럽게 랜선 집사가 됐다.
평소에도 고양이에 관심이 많기는 했다. 고양이 카페에 두 번 정도 가본 적이 있고, 나중에 혹여 독립을 하게 된다면 직접 고양이와 함께 살아보고 싶은 마음도 있다. 유튜브로도 고양이가 나오는 채널을 즐겨 본다. 그런데 이제는 한 차원 진화했다. 기세중 배우의 고양이를 하도 자주 보다 보니 내 힘으로 두 고양이의 미묘한 차이를 알아차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같은 종, 같은 색깔의 고양이는 다 똑같아 보였던 내가 마초와 쫄보는 단번에 구별해낸다. 쫄보는 눈과 눈 사이가 하얗고, 마초는 노랗기 때문이다. 외에도 고양이는 수직공간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충분한 공간을 마련해 줘야 하고, 이따금씩 말대꾸도 한다는 '집사 스토리'까지 알게 됐다. 내가 기세중 배우를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마초와 쫄보가 나오는 인스타 라이브 방송을 보지 않았더라면 영영 모르고 살았을 이야기들이다.
그저 누군가를, 무언인가를 좋아했을 뿐인데 그들은 나에게 늘 새로운 세상을 보여준다. 자연스럽게 따라가다 보면 생각지도 못했던 사건, 감정, 대상들과 만난다. 한 번 문을 열면, 그 너머로 또 다른 문이 등장하는 거다. 이러니 태어나길 '덕후'로 태어난 나는 번번이 낯선 길을 지나다니면서도 마음에 쏙 드는 것들을 부지런히 망태기에 담아내는 수밖에 없다. 마치 다람쥐가 열심히 도토리를 주워 제 볼에 한가득 담아내는 것처럼 타고난 본능이다. 한번 꽂히면 오로지 좋아하는 것에만 몰두하며 지내는 나는 이렇게나마 조금씩 나의 세계를 넓혀나간다.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내가 꽤 근사한 탐험을 하며 사는 듯한 기분도 든다. '우주는 미지의 영역이고, 우리가 새롭게 알아야 할 것, 새롭게 보아야 할 것은 아직도 남아있다.' 요즘 내 마음을 시큰하게 만드는 뮤지컬 <시데레우스>의 대사 중 하나다. 나에게 아직 닿지 못한 세상이 더 남아있다는 생각을 하면 괜히 또 심장이 떨린다. 진짜 주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