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다 Jan 07. 2021

구합니다, 구해요!


 '구합니다. 구해요.'


 졸린 눈을 비비며 간신히 핸드폰의 잠금화면을 푼다. 아직 뿌연 시야 속에서 더듬더듬 파랑새를 찾는다. 돋보기를 누르고 검색 기록에 접근, 내역에 저장되어 있는 #알앤제이 #알앤제이OST #데스노트 #데스노트초연 등의 검색어를 하나씩 눌러본다. 역시 내가 찾던 게시글은 없다. 그럼 이번에는 초록창으로 옮겨갈 차례다. 중고나라에서도 앞서 찾아본 검색어를 똑같이 입력해본다. 이곳에도 없다. 그렇다면 당근에게 마지막 희망을 걸어볼 수 밖에. 하지만 그 역시 응답이 없다. 우리 동네 이웃들은 공연을 도통 좋아하지 않나보다. 


휴- 오늘도 빈손이다.


 요즘 애타게 찾고 있는 MD들이 있다. 2019년 연극 <알앤제이> 재연 OST 앨범과 2015년 뮤지컬 <데스노트> 초연 프로그램북이다. 가격은 아무리 비싸봤자 3만 원을 넘지 않는다. 문제는 어디에서도 공식적인 루트로는 살 수 없게 된 상품들이라는 거다. 또 세상의 이치가 늘 그렇듯, 꼭 내가 가지고 싶은 물건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매력적으로 보이는 법이다. 결국 트위터, 네이버 중고나라, 당근마켓을 열심히 뒤져봐도 같은 상품을 간절히 구하는 사람만 있을 뿐, 팔겠다는 사람은 한 명을 만나기가 어렵다.    


 사고 싶은데 도무지 살 수 없을 때. 남들은 다 가지고 있는데 나에게만 없을 때. 소장 욕구는 정상 범위를 넘어서 무섭게 치솟는다. 살 수 없다고 하면 바짝 약이 올라서 기필코 손에 넣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인간의 어리석은 마음이란. 그러게 왜 진작 사라고 할 때 사지 않고선 뒤늦게 후회하는지. 


휴- 그러니까. 나도 내가 이걸 이렇게 원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지. 



사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공연장에 들어서면 일단 애써 눈을 가려본다. 연극, 뮤지컬 덕후이기에 앞서 지독한 문구류 사랑꾼인 나에게 MD 부스란 참새의 방앗간, 고양이 앞의 생선과도 같은 존재다. 사실 특별할 것 없는 노트, 볼펜에 작품의 로고를 새겨둔다거나 주요 소품의 모양을 뱃지로 만들어 파는 정도인데 왜 내 마음은 눈치없이 요동치는 걸까. 의문이다.


 말끔히 닦인 유리 장식장 앞에 서면 당장 눈 앞에 놓인 아이들을 사야만 하는 오만가지 이유가 떠오른다. '앗 이 노란 장미는 주인공의 정서를 담고 있는 상징적인 존재잖아'라거나 '세상에, 이건 작품을 떠나서 그냥 예뻐'라는 식이다. 이건 티파니앤코의 진열장 앞에서 영롱한 자태의 장신구를 바라보는 마음과 전혀 다를 바 없다. 


 가끔은 이런 상상도 해본다. "여기서 저기까지 싹 다 주세요!" 누구나 한 번쯤 드라마에서 들어본 적이 있을 법한 대사. 정말 짜릿하다. 사실 연극, 뮤지컬 MD는 그리 고가의 상품은 아니다. 20만 원 내외로 이뤄볼 만한 꿈이지만, 나는 마지막 남은 이성의 끈을 꽉 붙잡으려 노력한다. 그럼에도 언젠가는 스스로에게 선물해주고 싶은 버킷리스트 장면 중 하나다.   


 아직은 MD 부스 앞을 한참동안 서성이다가도 일단 한 발 물러선다. '그래. 딱 1막만 보고 다시 생각해보는 거야. 정말로 오래 간직하고 싶은 작품이라면 기념으로 프로그램북 딱 한 권만 사자. 어차피 집에 데려가도 둘 곳이 없잖아!' 


휴- 우선 나와의 1차 협상은 성공적이다. 그러나 싸움의 승자는 사실상 정해져 있다. 


 1막 내내 입을 다물지 못한 나는 인터미션이 시작되자 마자 MD 부스로 달려간다. 앞선 다짐은 이미 온데간데 없다. 혹시나 재고가 다 떨어졌으면 어쩌나 싶은 조바심만 존재할 뿐이다. 언젠가 한 번 '가방이 작아서 가져가기 불편하니까 다음에 왔을 때 사자'고 했다가 그 다음이 돌아오지 않았던 아찔한 기억이 떠오른다. 고민하는 자의 끝에는 차디찬 '품절'만이 있다.  



또 나만 없지?


 책장 안에 가지런히 꽂혀있는 프로그램북 한권을 꺼내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렇게 한 장 한 장 넘기다보면 추억으로 빠져드는 건 순식간이다. '그래 이때 이 배우만 머리카락을 붉은 색으로 물들였었지'하며 키득키득 웃을 때면 꼭 어린 시절 졸업 앨범을 열어보는 기분이 든다. 가끔은 이쪽 프로그램북에서 앳된 얼굴을 하며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신인 배우가 바로 옆 프로그램북에서 여유 넘치는 표정과 함께 근사한 포즈를 취하는 베테랑으로 바뀌어있는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 둘을 번갈아 쳐다보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그렇게 옛 기억을 떠올리다가 갑자기 눈이 동그랗게 떠질 때가 있다. 소극장 작품에서 주연 캐릭터를 찰떡같이 소화해서 내 마음속에 '저장'되어버린 배우의 얼굴을 오래전 사둔 프로그램북에서 우연히 찾았을 때. 세상에 이 작품에 앙상블로 출연했다니. 우리 이미 만난적 있는 사이잖아(?) 사람 일 정말 모른다더니 우리가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인연이었을 줄이야. 이럴 때면 사진 속 주인공과 그 어떤 친분도 없지만, 괜히 반가워진다.  


 난데없이 5년 전 판매된 <데스노트> 초연 프로그램북을 구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2015년의 나는 뮤지컬 입문자의 단계에 속했다. 1년에 좋아하는 배우를 따라 한 두 작품을 챙겨보며 문화 생활을 즐기는 기분을 냈다. 당연히 프로그램북을 구입하는 기준은 지금과 달리 아주 엄격했다. 사실 잘 꺼내보지도 않는 프로그램북을 꼭 사야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이는 시간이 흘러 인생에 몇 없는 과오가 되고 말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게 된 배우가 바로 그 데스노트 초연에 앙상블로 참여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되었을 때 나는 큰 상실감을 느꼈다. 이미 인지도를 한껏 높인 데뷔 8년차 배우의 과거 기록은 팬들에게 참으로 귀중한 자료인 까닭이다. 나는 왜 먼 미래를 생각하지 못하고 섣불리 합리적인 결정을 내렸던 것일까. 이렇게 과거의 나를 미워하게 되는 오늘의 내가 된다.   


 하지만 덕후에게 포기란 없다. 내가 헤매는 각 플랫폼들 안에서 언젠가는 한 번씩 기다리던 매물을 내어놓는 반가운 천사나 나타날 때가 있다. 물론 남들보다 늘 한 박자 늦어 영접의 기회를 놓치지만. 


 원하는 MD들을 구할 때까지 나의 기상 루틴은 일정하다. 구하고, 또 구하고, 계속 구한다. 언젠가 한 번은 나에게도 행운이 찾아오겠지. 이럴 때면 나에게서 전에 없던 끈기를 본다. 나에게도 이런 면이 있구나. 이토록 강한 의지를 조금 더 생산적인 방향으로 썼더라면 좋았을 것을. 아무래도 이런 나의 모습은 엄마에게 비밀로 하는 것이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괜찮아, 마음껏 울어도 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