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합니다. 구해요.'
졸린 눈을 비비며 간신히 핸드폰의 잠금화면을 푼다. 아직 뿌연 시야 속에서 더듬더듬 파랑새를 찾는다. 돋보기를 누르고 검색 기록에 접근, 내역에 저장되어 있는 #알앤제이 #알앤제이OST #데스노트 #데스노트초연 등의 검색어를 하나씩 눌러본다. 역시 내가 찾던 게시글은 없다. 그럼 이번에는 초록창으로 옮겨갈 차례다. 중고나라에서도 앞서 찾아본 검색어를 똑같이 입력해본다. 이곳에도 없다. 그렇다면 당근에게 마지막 희망을 걸어볼 수 밖에. 하지만 그 역시 응답이 없다. 우리 동네 이웃들은 공연을 도통 좋아하지 않나보다.
휴- 오늘도 빈손이다.
요즘 애타게 찾고 있는 MD들이 있다. 2019년 연극 <알앤제이> 재연 OST 앨범과 2015년 뮤지컬 <데스노트> 초연 프로그램북이다. 가격은 아무리 비싸봤자 3만 원을 넘지 않는다. 문제는 어디에서도 공식적인 루트로는 살 수 없게 된 상품들이라는 거다. 또 세상의 이치가 늘 그렇듯, 꼭 내가 가지고 싶은 물건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매력적으로 보이는 법이다. 결국 트위터, 네이버 중고나라, 당근마켓을 열심히 뒤져봐도 같은 상품을 간절히 구하는 사람만 있을 뿐, 팔겠다는 사람은 한 명을 만나기가 어렵다.
사고 싶은데 도무지 살 수 없을 때. 남들은 다 가지고 있는데 나에게만 없을 때. 소장 욕구는 정상 범위를 넘어서 무섭게 치솟는다. 살 수 없다고 하면 바짝 약이 올라서 기필코 손에 넣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인간의 어리석은 마음이란. 그러게 왜 진작 사라고 할 때 사지 않고선 뒤늦게 후회하는지.
휴- 그러니까. 나도 내가 이걸 이렇게 원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지.
공연장에 들어서면 일단 애써 눈을 가려본다. 연극, 뮤지컬 덕후이기에 앞서 지독한 문구류 사랑꾼인 나에게 MD 부스란 참새의 방앗간, 고양이 앞의 생선과도 같은 존재다. 사실 특별할 것 없는 노트, 볼펜에 작품의 로고를 새겨둔다거나 주요 소품의 모양을 뱃지로 만들어 파는 정도인데 왜 내 마음은 눈치없이 요동치는 걸까. 의문이다.
말끔히 닦인 유리 장식장 앞에 서면 당장 눈 앞에 놓인 아이들을 사야만 하는 오만가지 이유가 떠오른다. '앗 이 노란 장미는 주인공의 정서를 담고 있는 상징적인 존재잖아'라거나 '세상에, 이건 작품을 떠나서 그냥 예뻐'라는 식이다. 이건 티파니앤코의 진열장 앞에서 영롱한 자태의 장신구를 바라보는 마음과 전혀 다를 바 없다.
가끔은 이런 상상도 해본다. "여기서 저기까지 싹 다 주세요!" 누구나 한 번쯤 드라마에서 들어본 적이 있을 법한 대사. 정말 짜릿하다. 사실 연극, 뮤지컬 MD는 그리 고가의 상품은 아니다. 20만 원 내외로 이뤄볼 만한 꿈이지만, 나는 마지막 남은 이성의 끈을 꽉 붙잡으려 노력한다. 그럼에도 언젠가는 스스로에게 선물해주고 싶은 버킷리스트 장면 중 하나다.
아직은 MD 부스 앞을 한참동안 서성이다가도 일단 한 발 물러선다. '그래. 딱 1막만 보고 다시 생각해보는 거야. 정말로 오래 간직하고 싶은 작품이라면 기념으로 프로그램북 딱 한 권만 사자. 어차피 집에 데려가도 둘 곳이 없잖아!'
휴- 우선 나와의 1차 협상은 성공적이다. 그러나 싸움의 승자는 사실상 정해져 있다.
1막 내내 입을 다물지 못한 나는 인터미션이 시작되자 마자 MD 부스로 달려간다. 앞선 다짐은 이미 온데간데 없다. 혹시나 재고가 다 떨어졌으면 어쩌나 싶은 조바심만 존재할 뿐이다. 언젠가 한 번 '가방이 작아서 가져가기 불편하니까 다음에 왔을 때 사자'고 했다가 그 다음이 돌아오지 않았던 아찔한 기억이 떠오른다. 고민하는 자의 끝에는 차디찬 '품절'만이 있다.
책장 안에 가지런히 꽂혀있는 프로그램북 한권을 꺼내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렇게 한 장 한 장 넘기다보면 추억으로 빠져드는 건 순식간이다. '그래 이때 이 배우만 머리카락을 붉은 색으로 물들였었지'하며 키득키득 웃을 때면 꼭 어린 시절 졸업 앨범을 열어보는 기분이 든다. 가끔은 이쪽 프로그램북에서 앳된 얼굴을 하며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신인 배우가 바로 옆 프로그램북에서 여유 넘치는 표정과 함께 근사한 포즈를 취하는 베테랑으로 바뀌어있는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 둘을 번갈아 쳐다보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그렇게 옛 기억을 떠올리다가 갑자기 눈이 동그랗게 떠질 때가 있다. 소극장 작품에서 주연 캐릭터를 찰떡같이 소화해서 내 마음속에 '저장'되어버린 배우의 얼굴을 오래전 사둔 프로그램북에서 우연히 찾았을 때. 세상에 이 작품에 앙상블로 출연했다니. 우리 이미 만난적 있는 사이잖아(?) 사람 일 정말 모른다더니 우리가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인연이었을 줄이야. 이럴 때면 사진 속 주인공과 그 어떤 친분도 없지만, 괜히 반가워진다.
난데없이 5년 전 판매된 <데스노트> 초연 프로그램북을 구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2015년의 나는 뮤지컬 입문자의 단계에 속했다. 1년에 좋아하는 배우를 따라 한 두 작품을 챙겨보며 문화 생활을 즐기는 기분을 냈다. 당연히 프로그램북을 구입하는 기준은 지금과 달리 아주 엄격했다. 사실 잘 꺼내보지도 않는 프로그램북을 꼭 사야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이는 시간이 흘러 인생에 몇 없는 과오가 되고 말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게 된 배우가 바로 그 데스노트 초연에 앙상블로 참여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되었을 때 나는 큰 상실감을 느꼈다. 이미 인지도를 한껏 높인 데뷔 8년차 배우의 과거 기록은 팬들에게 참으로 귀중한 자료인 까닭이다. 나는 왜 먼 미래를 생각하지 못하고 섣불리 합리적인 결정을 내렸던 것일까. 이렇게 과거의 나를 미워하게 되는 오늘의 내가 된다.
하지만 덕후에게 포기란 없다. 내가 헤매는 각 플랫폼들 안에서 언젠가는 한 번씩 기다리던 매물을 내어놓는 반가운 천사나 나타날 때가 있다. 물론 남들보다 늘 한 박자 늦어 영접의 기회를 놓치지만.
원하는 MD들을 구할 때까지 나의 기상 루틴은 일정하다. 구하고, 또 구하고, 계속 구한다. 언젠가 한 번은 나에게도 행운이 찾아오겠지. 이럴 때면 나에게서 전에 없던 끈기를 본다. 나에게도 이런 면이 있구나. 이토록 강한 의지를 조금 더 생산적인 방향으로 썼더라면 좋았을 것을. 아무래도 이런 나의 모습은 엄마에게 비밀로 하는 것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