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장에서 자주 한눈을 판다. 물론 집중력이 부족해서도 그렇지만, 나에게 허락된 시간 동안 눈에 담고 싶은 것이 많아 그런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교실 문 밖으로 쏟아져 나가며 티격태격 장난을 치는 학생들의 뒷모습을 보는 게 아니라 조금씩 색깔을 바꿔 텅 빈 교실 안을 따뜻한 주황빛으로 물들이는 조명을 유심히 쳐다보는 거다. 한 번은 드라큘라와 그를 뒤쫓는 이들의 박진감 넘치는 추격 액션이 펼쳐지는 와중에 정신없이 뒤바뀌는 무대 세트를 넋 놓고 쳐다본 적도 있다. '와, 이거 규칙이 뭐길래 저렇게 척척 새로운 공간이 나타나는 거야?'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를 보면서도 자주 시선을 빼앗겼다. <맨 오브 라만차>는 작가 세르반테스와 그의 작품 속 인물인 돈키호테가 주인공이다. 세르반테스가 지하 감옥에 갇혀 죄수들로부터 위협을 받는 장면으로 시작되는데, 세르반테스는 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자신의 희곡 작품을 직접 연기해 보인다. 작품 속 '무적의 기사' 돈키호테가 사랑하는 여인의 이름은 알돈자. 그런데 알돈자는 <맨 오브 라만차>의 막이 오르고 나서도 한참 동안이나 인기척을 내지 않는다. 무대 왼쪽 끝 편에 앉아 초점 잃은 눈을 하고 멍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다. 그 어떤 이들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는다. 그렇게 20분은 지났을까. 세르반테스가 자신의 작품 속으로 그녀를 끌어들이고 나서야 기어이 존재감을 얻는다.
사실 시작부터 알돈자에게 자꾸만 눈이 갔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그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도대체 어떤 삶을 살고 있길래 저렇게 허무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끊임없이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바로 옆에서는 세르반테스&돈키호테를 맡은 홍광호 배우가 매혹적인 목소리와 재치 있는 몸짓으로 오프닝넘버인 '맨 오브 라만차(라만차의 기사)'를 부르고 있는데, 내 시선은 공연히 알돈자를 향했다. 그 순간 홍광호의 몇몇 움직임이나 표정을 놓쳤지만, 틈틈이 알돈자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본 것은 결국 만족스러운 선택이었다. 스스로를 '둘시네아'로 지칭하며 달라진 삶을 예고한 알돈자의 마지막 얼굴과 나란히 비교해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나에게 전해저 오는 감동은 더욱 컸다.
객석에선 주위 사람들을 위해 움직임을 최소화하는 것이 기본 매너다. 몸이 좀 불편할 수는 있다. 그런데 나는 그곳에서 오히려 자유로움을 느낀다. 제각각 자리를 잡은 수많은 사람들과 똑같은 무대를 보고 있지만, 그것을 느끼고 해석하는 방식은 오로지 내 마음이 결정하기 때문이다. 남들이 모두 노래를 부르는 주인공에 집중하고 있을 때, 나는 그와 마주 선 상대 배우의 표정을 관찰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저 내 선택일 뿐이니까. 내가 그 순간 누굴 보든 다른 사람들에겐 알 바가 아니다. 사실 관심도 없다. 영화나 드라마의 경우엔 제작자의 의도를 바탕으로 특정 장면이 네모의 틀 안에 갇히지만, 공연은 그렇지 않다. 나에게 주어진 선택의 여지가 훨씬 많다. 이것만으로도 괜히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바로 옆 자리에 앉아 함께 공연을 봤던 친구와 이런 대화를 나눌 때가 있다.
"야, 너 그 장면에서 주인공 표정 봤어? 눈물이 똑 떨어졌다니까. 진심으로 소름 돋았다."
"아니 못 봤는데, 나 그때 딴 거 보느라. 근데 그 장면에서 조명 진짜 잘 썼더라. 연출 정말 천재 아닐까."
같은 장면을 보고도 우리는 다른 것을 본다. 하지만 "그것도 안 보고 뭐했어"라며 서로를 나무라지 않고, "아 그거 놓쳤네"하면서도 쿨하게 지나친다. 우리는 그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 순간을 만끽했을 뿐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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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회사에서의 어느 날이 기억났다. 부장에게 사직서를 들이밀기 한 달 전쯤이었던 것 같다. 퇴근을 하려는 데 사수가 난데없이 나를 회의실로 불러냈다. 그의 손에는 그날 발행된 신문이 쥐어져 있었다. 속으로 '또 한 마디 하겠구나'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선배는 회의실 테이블 위에 신문을 착 펼쳤다. 내 기사가 실린 페이지가 나왔다. 그리고 이어진 물음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박혀있었다.
"너 도대체 왜 문단 제일 앞에 주어를 안 쓰냐?"
"이건 OOO에 대해서만 쓴 글인데요. 이 기사를 처음부터 읽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 문장의 주어가 OOO라고 생각할 테니까요.
동일한 주어가 반복적으로 쓰일 필요 없어서 생략했습니다. 이전에 ***선배도 반복되는 주어는 생략하라고 주의를 줬습니다."
"그래서 지금 네 문장은 가독성이 떨어져. 그리고 현학적이야. 너는 다른 사람들 기사는 안 읽어보니?"
할 말은 아주 많았지만,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만큼 지쳐있었다. 기자라는 직업을 가지면 자율적이고 주체적으로 살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는데. 모두 착각이었다. 때로는 회사, 동료의 입장을 염두에 두고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의 글을 써야 할 때도 더러 있었다. 특히 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진심을 다해 귀 기울이고, 그 말들을 다시 예쁜 그릇에 정성껏 담아 세상에 내어놓는 작업을 좋아했다. 하지만 '진짜' 기자라고 인정받는 것들은 대개 규칙, 규정, 기술, 숫자, 데이터 등이었다. 감정, 생각, 태도 같은 것들을 좋아하는 내 글은 연약하고 시시하다는 거였다.
암묵적인 분위기 속에서 나는 기어이 내 본연의 색깔을 뽐내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흥, 복잡하고 어려운 기술 분석 같은 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고.' 소심하게 속으로만 반기를 들었다. 그러다 보니 급기야 내 문장의 주어 하나에까지 태클이 들어온 거다. 가독성. 그래 가독성. 아주 중요하다. 하지만 나는 더 중요한 게 있다고 믿었다. 사람들이 내 글을 흥미롭게 읽어 내려가는 이유는 내 손 끝에서 태어난 예쁘고 깔끔한 명문장이 아니라, 그 문장 안에 담긴 빛나는 이야기들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누군가의 글을 읽을 때 그랬으니까. 그러니 문단 제일 앞에 주어를 쓰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맞다 틀리다 혹은 낫다 별로다를 따질 일이 아니었다. 그냥 다른 거지.
내가 롤모델로 삼았던 어느 선배가 딱 그랬다. '도대체 어떤 식으로 대화를 이끌어나가면 이 사람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하는 호기심을 갖게 하는 사람이었다. 스크롤을 내리면 내릴수록 점점 더 깊어지는 그 대화들을 나는 항상 푹 빠져 읽었고, 또 감탄했다. '나도 이런 기사를 써야지'하고 부러워도 했다. 그 선배 역시 개의치 않고 그런 문장들을 썼다. 문단 가장 처음에 주어를 넣어도, 안 넣어도 그만인 문장들. 꼭 주어가 누구인지 명시하지 않아도 나는 그 문장의 뜻을 온전히 이해했다. 오히려 군더더기 없이 소박하게 짜인 문장들이 인터뷰이의 감정들을 단단하게 받쳐주고 있었다.
사수에게 난데없이 불려 갔던 그날. 나는 그에게 이 말만은 꼭 해야 했다.
"제가 쓰는 기사에서 중요한 건 따로 있어요.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 언제나 우선이에요.
그러니까 문장을 어떻게 쓰든 전혀 상관없는 거죠. 그러니 그냥, 제가 알아서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