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학도로 편입한 수업에서 만난 그림책 한 권이 내게 던진 질문은 사색의 맛을 알게 했다. 책 표지에 세 개의 그림이 시선을 붙잡는다. 첫 번째 그림에서 그나마 듬성듬성했던 할아버지의 앞머리숱이 두 번째 그림에서는 사라지고, 할머니는 모자를 벗었다. 마지막 그림에서는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고 할머니 혼자만 남아, 머리에는 상주가 꽂는 핀이 꽂혀 있다. 시간의 흐름을 말없이 전하고 있다.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이 그림책 한 권에 담겨있다.
"옥춘당"이라는 제목은 처음 보았을 때 뭐지? 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빵집 이름일까? 대전의 성심당처럼 유명한 가게일까? 아니면 검정 고무신 만화에 나오는 어떤 장소일까? 책장을 넘기자 알록달록한 사탕 그림을 보고 알아차렸다. 옥춘당은 예전 제사상에 올랐던 화려한 색깔의 동그란 사탕이었다. 어릴 적 입안에서 녹여 먹으면 입술까지 빨갛게 물들던 그 사탕 말이다.
전쟁고아였던 할아버지 고자동 씨와 할머니 김순임 씨는 기차역이 있는 작은 도시에 터전을 마련 후, 슬하에 삼 남매를 두고 살았다. 외향적인 할아버지와 달리 낯가림이 심했던 할머니에게는 할아버지가 남편이자 유일한 친구였다. 기차역 주변에는 술집들이 즐비했고, 술집에서 일하는 여성들에게 집을 내주지 않는 것이 동네의 불문율이었다. 하지만 집 없는 설움을 아는 할아버지는 주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세를 놓았다. 다만 네 가지 규칙을 정해주었고, 그중에서도 일요일마다 동네 골목길 청소를 하는 모습을 보고 주민들의 마음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오늘 볕이 따갑네" 하시며 할머니에게 모자를 씌워주던 할아버지의 자상함은 제사상에 올랐던 옥춘당을 할머니 입에 넣어주는 작은 일상에서도 드러난다. 곱게 핀 봉숭아를 따서 손녀에게 물을 들여주기도 하고, 만화영화 주제곡을 불러주기도 하던 할아버지에게 폐암이라는 몹쓸 병이 찾아온다.
두 사람은 옛날 일을 떠올리면서, 변함없이 일상을 함께 보내는 것으로 마지막 인사를 준비한다. 폐암 선고를 받은 할아버지는 홀로 남겨질 할머니를 걱정하며 이것저것 당부하셨다. 할아버지의 죽음을 준비하는 자세는 그의 인생 전체를 반영하고 있다. 전쟁고아로 살아온 그에게 삶과 죽음은 어쩌면 익숙한 동반자였을지도 모른다. 소박하지만 진심이 깃든, 화려하지 않지만 사랑이 넘치는 그런 마무리, 아침에 일어나 함께 밥을 먹고, 마당에 나가 햇볕을 쬐고, 손자 손녀들의 이야기를 나누는 소소한 일상, 할아버지는 이런 평범한 순간들이 가장 특별한 순간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떠난 세상에서 할머니가 살아갈 시간을 미리 준비해주고 싶었고, 그 준비는 바로 평범한 일상 속에서 이루어졌다. 변함없는 일상이야말로 그가 할머니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자,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는 가장 의미 있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장례식을 치른 후, 할머니는 말을 잃었다. 할머니는 소중한 기억을 간직하기 위해 이곳의 시간에는 관심 없는 사람처럼, 멍하니 하늘만 바라본다. 유일한 친구를 잃은 할머니는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어져 조용한 치매에 걸리고 만다. 10년의 요양원 생활을 마치고, 스무 해 전에 먼저 떠난 할아버지 곁으로 가신다.
내 어린 시절에도 그런 사탕이 있었다. 옥춘당을 보며 추억이 물밀듯 밀려왔다. 내 어머니도 할아버지처럼 집 없는 설움이 가장 큰 설움이라며 동네에 오갈 데 없는 이들을 재워주었다. 심지어 집도 지어주셨다. 세월이 흘러 그 공은 사라졌지만, 내 기억 속에는 생생하게 남아있다.
내 엄마도 요양원 생활을 하다 이 세상 소풍을 마쳤다. 2주에 한 번씩 찾아가는 것으로 내 할 도리를 다한다고 생각했다. 건강하던 엄마가 순식간에 쇠약해지는 모습을 보며, 어른들은 한순간이라는 말을 실감했다. 건강할 때 엄마 손 잡고 여행 한 번 제대로 못한 게 한으로 남는다. 이 책을 읽으며 모든 것에는 때가 있고,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진리를 다시금 깨닫는다.
그림책이라고 하면 어린아이들만의 것이라 생각했던 내게, 이 책은 깊은 울림을 준다. 도서관에서 4권의 그림책을 빌려와 여러 번 읽고 있다. 아이들이 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새로운 감정이 샘솟는다.
8페이지에 그려진 '오줌은 두 칸, 똥은 세 칸' 물 절약하는 모습에서 시대의 아픔이 느껴졌다. 서로를 아껴주고 사랑하며 좋은 것은 챙겨주고 궂은일은 의논하면서 살아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모습은 한 편의 휴먼스토리 같다.
현대 사회에서 자식들은 바쁘다는 이유로 부모님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 작가는 다정했던 할아버지, 할머니 덕분에 좋은 추억을 간직할 수 있었다. 그 추억이 좋은 글의 소재가 된다. 어린아이라고 모르는 것이 아니다. 어릴 때의 경험이 좋은 기억으로 남게 하는 것, 그것이 어른들의 중요한 역할인 것 같다.
인간의 정서가 형성되는 시기의 중요성과 부모의 책임감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어른다운 어른이 점점 사라지는 시대에, 아련한 어릴 적 추억이 어른다움의 자양분이 되는 것 같다.
옥춘당은 가슴 뭉클한 추억과 따뜻함을 선사하는 보약 한 사발과도 같다. 인생의 소중한 순간들을 놓치지 말고, 가까이 있는 이들에게 더 많은 시간을 내어주라고 속삭인다. 왜냐하면 옥춘당처럼 달콤한 기억도, 그 기억을 만들어준 사람들도 영원히 곁에 있지는 않으니까.
당신의 옥춘당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당신의 옥춘당을 함께 나눌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지 마세요.
그림책은, 일반 책과 달리 금방 읽을 수 있는 장점과, 오래오래 사색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이 참 좋다. 아이들만 그림책을 읽을 것이 아니라, 어른들도 그림책을 읽으면서 메마른 정서를 회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앞으로 그림책 사랑에 푹 빠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