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사는 인생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 필사#67(D+308)
책장 앞에 선 나
책장 앞에 선다.
손은 책 등을 어루만지지만, 마음은 이미 뒤돌아선다.
펼치고 싶은 마음과 펼칠 수 없는 현실 사이,
그 틈새에서 나는 서성인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책은 내 피난처였다. 일에 지치고 사람에 싫증 날 때면 책 속으로 숨어들었다. 글자 하나하나가 나를 위로했고, 작가의 시선이 내 세상을 넓혀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좋아하는 책조차 무거운 짐처럼 느껴진다.
"계속해서 성장하지 않는 사람일수록 쉽게 싫증을 느낀다."
니체의 말이 가슴에 박힌다. 나는 성장을 멈춘 걸까? 새로운 일을 찾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려 했던 것도 결국 성장하지 않는 마음이 만든 도피였을지도 모른다. 변화하지 않으니 모든 것이 시시하고, 시시하니 계속 새것을 찾아 헤맸다.
창밖 나무를 본다.
같은 자리에 서 있지만 매일 다른 빛을 받는다.
성장한다는 것, 어쩌면 자리를 바꾸는 게 아니라
같은 자리에서 다르게 보는 것일지도.
"가만히 앉아 글자만 읽으면 나아지는 게 없다."
김종원 작가의 말이 따갑다. 나는 책을 읽기만 했다. 밑줄 긋고, 필사하고, 감동받았지만 정작 나아지려는 방법을 투철하게 사색하지 않았다. 책은 읽었지만 삶은 읽지 않았다.
책상 위 펜이 굴러간다.
한 줄 그으면 직선이 되지만
여러 번 그으면 면이 되고, 공간이 된다.
사색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지금 나는 무기력하다. 책장 앞에 서도 손이 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 무기력함마저 성장의 신호일 수 있다. 이전의 나로는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몸의 신호, 마음의 외침일 수 있다.
무기력에서 탈출하는 방법이 독서라는 걸 안다. 하지만 독서로 가는 길목에서 나는 멈춰 있다. 그렇다면 멈춘 이곳에서 시작해 보자. 책을 펼치지 않아도 책 한 권을 바라보는 것부터. 한 페이지를 읽지 않아도 한 문장을 음미하는 것부터.
손목시계가 째깍거린다.
똑같은 소리지만 매 순간 다른 시간을 가리킨다.
시간은 멈추지 않으니까
나도 멈출 수 없다.
성장한다는 것은 거창한 변화가 아니다. 같은 책상, 같은 책, 같은 나이지만 어제와는 다른 마음으로 마주하는 것이다. 무기력도 나의 일부라면, 무기력한 채로 책을 펼쳐보자. 읽히지 않아도 좋고, 이해되지 않아도 좋다.
시작은 언제나 작고 보잘것없다.
하지만 작은 시작이 쌓여 큰 변화가 된다.
오늘, 나는 책장 앞에 선다.
손을 뻗어 책을 꺼낸다.
펼치지 못해도 좋다.
손에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다시 시작하고 있으니까.
성장하는 사람은 똑같은 사물에서도 새로움을 본다.
나는 오늘, 낡은 책에서 새로운 나를 만날 준비를 한다.
“무기력은 멈춤이 아니라, 나를 새롭게 깎아내는 침묵의 시간이다.”-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