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외로움 없는 삼십대 모임》 후기
지난 토요일부터 몸에 힘이 점점 없어지고 있는 느낌이다. 오늘은 잠에서 깨면서 문득 교통사고를 내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을 했다. 소중한 사람을 태우고 있었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아무래도 운전을 하기엔 너무 쫄보인 것 같다. 아까운 운전 연수비. 그러나 연수비보다 더 심각한 문제로 나는 울고 싶었다. 희한하게도 내가 10초 이상 안고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한 명도 없다. 세 계절 전에는 있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연애를 하고 싶지는 않다. 그건 너무 짜치는 이유다. 그냥 과자를 먹었다. 어제도 자기 전에 과자를 먹었는데. 이래서 과자를 사 놓으면 안 된다. 그리고 담배를 피웠다. 그러니까 조금 힘이 난 것 같기도 했는데, 산책을 하고, 출근을 하니까 다 없어졌다.
이 책은 위의 문단처럼 ‘아무렇게나’ 쓴 것처럼 읽힌다.(물론 절대 아니겠지) 마치 일기장같다. 어떤 부분은 은유를 쓰고 함축적이라 이해하기 어렵다. 시 같다고 생각했다. 그보다 포토샵 회색 바둑판 무늬처럼 깔려 있는 외로움 때문에 더 힘들었다. 그래서 자꾸 읽다가 인터넷 세상으로 도피하게 됐다. 인간들이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느끼게 되)는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 뭐 그런 것으로. 그래서 중간엔 폰을 꺼야 했다.
글들을 읽다 보니 나도 ‘아무렇게나’ 쓰고 싶다. 그러니까, 내 감정을 덜 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가끔씩 실제보다 큰 껍데기를 입고 다니는 느낌이 든다. 글을 쓸 때 특히 그렇다. 글은 내가 읽은 것들을 인용하고 모방할 수 있고, 한 번 쓴 걸 고치고 다시 써서 제법 그럴듯하게 완성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의 나는? 눈치 없고 급발진하고 오해받고 주눅들고 이불킥하는 애송이인데요. 글로는 그런 걸 말끔하게 감출 수 있다. 그런데 그게 정말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외로움은 거기서 오는 것 같다. 나를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관계가 없음에.
제목은 ‘외로움 없는’인데, 내용은 ‘친구 없는’에 가까운 것 같다. 그러니까 이건 비하의 의미가 아니라, 고백컨대 나도 그러한데, 의지할 사람이 없다는 말에 가깝다. 글에서 가끔 ‘ㅇ’이라거나 ‘ㅈ’이라거나 화자가 친밀함을 느끼는 어떤 특정한 인물이 나타나면 너무 반가웠다. 전화벨 소리에 놀라고, 통화를 즐거워하고, 만날 날짜를 기다리는 마음을 묘사하는 말들과 함께 덩달아 설렜다. 그런데 이야기는 금세 그에 대한 관심과 기대를 거두어 버리는 쪽으로 흘러간다. 다른 사람을 만나거나 불특정 다수와 섹스를 하러 가거나 집에 혼자 남는 식이다. 화자는 담담한데, 괜히 내가 시무룩해진다.
하지만 그 마음을 알 것 같다.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건 위험하고 두려운 일이니까. 너무 의지하게 되기 전에 그 마음을 철수하는 것. 쓰나미같은 외로움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잔잔한 외로움과 함께하는 것, 그러니까 뭐에 비유할 수 있을까. 어두움에 익숙한 눈을 유지하기 위해서 밝은 빛을 보지 않는 것? 빛이 들지 않는 곳에 살다 보니 눈이 퇴화해 버린 심해의 물고기가 떠오른다.
나와 글쓴이의 욕망과 그 실천은 수박의 초록색 부분과 빨간색 부분처럼 다른데도, 그의 외로움에 비춰 내 외로움을 들여다보며 “감정이 쓰다듬어지는”(69쪽)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나도 내 외로움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진다. 나는 요즘 내 내면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면서, 그것이 나를 둘러싼 관계들을 파국으로 치닫게 하는 것을 막으려고 머리에 잔뜩 힘주고 살고 있다. 그래서 사실은 되게 힘들다. 피곤함을 덜려면 머리에 힘을 빼야 하는데 머리에 힘을 빼면 잘못된 말과 행동이 튀어나갈 것 같다. 마치 웨이트 트레이닝 같다. 트레이너는 어떤 근육에 힘을 쓰려면 숨을 참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다 보면 숨 쉴 타이밍을 잊어 버려서 어지럽다.
책에는 캐주얼 섹스, 그룹 섹스에 대한 묘사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김치찌개를 먹었다. 맛있었다’라고 말하듯이 ‘형의 항문에 싸고 나왔다. 기분이 좋았다’ 식으로 쓴다. 그게 나에게는 일종의 시위처럼 느껴졌다. 분명히 벌어지고 있는 일인데 왜 이렇게 말해지기 힘든지, 왜 아무도 말하지 않는지, 왜들 그리 고상한 척하는지 따지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욕망들, 경험들과 일생의 과제로서의 외로움은 결코 따로 말해질 수 없는 것임을 읽다 보면 알게 된다. 아무리 누군가 위험해 보여도 열차 선로를 변경하듯 한 사람을 돌려 세울 수는 없다.
그래서 이 책이 특별히 불행한 어떤 삶에 대한 이야기로 읽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두가 가지는(가졌던) 외로움과 때로 무언가를 파괴하고 싶은 욕망을 깨닫고 이름지을 수 있었으면, 그래서 남들보다 더 외로운 사람들이 부당하게 외롭지는 않도록 신경쓰게 된다면 좋겠다.(외로움 평준화?) 심해어는 눈이 퇴화한 대신 다양한 파장에서 광자들을 가능한 한 남김없이 포착할 수 있는 능력인 ‘초시력’이 발달했다고 한다. 그 발견은 학계에 '빛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정말, 사랑이란 대체 무엇인가?
문장들.
“누군가와 오래 만났고, 좋은 관계를 가졌다고 해서 또 그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렇게 새벽 두시가 될 때까지 동네 골목을 빙글빙글 돌았는데 나는 ㅇ과 연락된 게 기쁜 나머지 다음날 화가 날까봐 겁이 났다.”
“그날은 호모바에 들어가면 사장 형이 있다. 내가 자기를 언제부터 좋아해왔는지 모르며 알 필요도 없는, (…) 그 이전과 이후의 삶이 완전히 달라진 나를 모르는 중년 남자”
“좁은 인도 골목을 앞장서서 걸으면 뒤에서 ㅈ이 따라 왔다. ㅈ이 나와 같이 있지만 스스로 혼자라고 느낄까봐 겁이 났다. 어쩔 수 있는 게 아닌데도”
“토요일엔 결혼식이 있었는데 거기에 안 가려고 나는 멀리 어디든지 가야 한다는 생각을 나에게 주려고 노력했다. 이유가 필요해서 만들었고 감정이 도와주길 원했다.”
“상상 속에서, 나는 에너지가 백 있으니까 그중 삼십이나 사십 정도를 나를 수정하는 데 사용할 수 있을 거야, 믿고 싶어지죠. 하지만 대부분의 안 건강이들은 존재하는 것에 백을 다 써버려서 남은 힘이 없어요.”
etc.
- 읽으면서 자꾸 이자혜 작가 생각이 났다. 잘 지내실까? 최근 소식을 찾기 어렵다. 〈미지의 세계〉는 나에게 여러 방향으로 생각의 금기를 깨어 준 작품이었는데. 그런 꼭 나같은 음험한 이십대 여자가 그냥 존재하는데 뭐 어쩔 거냐는, 그런 우리도 뭐 어찌어찌 살 수 있지 않겠냐는 응원을 받았는데. 잘 지내셨으면.
- 힘이 너무 없어서 반차를 냈다. 해야 할 일 들어야 할 인터넷 강좌 더러운 방이 마음의 부담으로 켜켜이 쌓여 있음에도 오늘은 이 책에 몰입하게 됐다. 외로움을 들여다 보는 시간이 필요했다. 안 건강이 살려...
- 이 글을 공개하고 나서, 나와 다르다라고 쓴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보통 모든 것들에 나와 다르다고 느끼지만, 이 책에 대해서만큼은 왠지 다르다고 쓰면 안 될 것 같았다. 왜냐면 이런 어떤 경험과 욕망들이 너무 쉽게 다르다고 치부되기 때문에. 하지만 나는 이 다름까지 외롭게 느껴질 정도로 다르다고 느꼈기 때문에 다르다고 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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