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x호소인'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
기질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모든 일에는 배움이 있다는 말은 그만큼 실패나 좌절을 많이 겪어봤기에 피부로도 와닿는 문구가 되었다. 일, 친구, 사회생활, 연애 모든 방면 어디에서나 한번 쯤은 느껴본 생각이다. 회사에서 울며 나왔을 때, 인간관계에서 혹독한 시련을 겪었을 때 등등 나름 스스러가 많은 걸 배웠다고 생각했다. 그중 가장 컸던 건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으려면 가장 중요한 건 나 자신이 변화해야 한다는 사실. 나름의 대안이라고 내놓은 것들이 몇가지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아닌 다소 냉소적인, 페르소나를 상정해 놓고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하고자 나름의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굴리기도 했고, 누군가가 무례하게 대했을 때 바보처럼 웃기보다는 '어? 상처 주네?'라고 말했다는 한 개그우먼의 말을 무한 반복으로 되뇌곤 했었다.
파워 'F'인 내가 고향에 내려가거나,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났을 때 늘 하던 말이 있다.
"나 육지 오고 나서 흑화 됐어."
그래도 지금 쯤이면 거절도 못하고 할 말도 제대로 못해서 끙끙 앓던 예전과는 달리 이제는 적당히 잘라낼 줄도 알고 할 말도 제대로 소리 내서 이야기할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부풀었었다. 특히 남들이 하는 말들에도 크게 개의치 않고 '아, 뭐래~'하고 넘길 배짱도 넉넉하게 갖췄다고 생각했다. 흔히 말하는 'T'가 되었다는 그런 느낌.
그런데 요즘 안온하다 느꼈던 내 일상에서 자꾸 뭔가 에너지를 빼앗기고 힘이 든다는 느낌을 받았다. 카톡 알람도 꺼버리고, 자이언티 노래처럼 집에 있어도 집에 가고 싶어졌다. 무엇이 나의 에너지를 옭아매고 있던 걸까. 내 머릿속의 떠도는 모든 감정찌꺼기들을 종이에 다 써 내려가봤다. 최근 느꼈던 여러 가지 감정들을 여과 없이 다 들춰내보니, 여전히 모든 주변의 부정적인 말들과 감정들에 크게 공감하고 오감으로 느끼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더 심각한 건 그런 말들을 적당히 잘라내지 못하고 그냥 묵묵히 다 들어줬던 것. '나 힘들어'라고 누군가가 이야기하면 '인생은 원래 다 그런 것이여~'하고 개의치 않아야 하는데 내 감정에도 요동이 치며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과 의견들을 다 담아두고 있던 것이다.
여전히 나는 'T'가 아닌 'T호소인'이었다. 어릴 때부터 누가 울면 따라 울고, 누가 힘들어하면 같이 감정의 늪에 빠져 허덕이던 그 기질은 성인이 되어서도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다. 충격요법을 받으면 달라질 줄 알았건만 여전히 기질이란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그래도 이런 숨기고 싶은 나의 기질과 본능이, 개똥도 약에 쓰일 데가 있는 것처럼 좋은 일에 쓰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주 작은 믿음이 마음 한 구석에서 여전히 굳건하게 자리하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호구로 보일 수 있겠지만, 나의 이런 유약한 기질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 강점으로 드러날 때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당장 필요한 건 맞지도 않는 모호한 가면을 쓰고 사는 게 아니라 그냥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여기서 더 슬기롭게 대처해 나가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부분이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