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칼바람을 모르고 자란 온실 속 꽃은, 언젠가 예상치 못한 미풍에도 무너지게 된다. 서리 낀 새벽, 얼음처럼 차가운 안개, 잎을 스쳐 가는 작은 생의 위협조차 제대로 견뎌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온실 속 꽃은 살아있지만, 약하다. 나도 한때 온실 속에서만 자란 화초같은 사람이었다. 결과적으로 언젠가 나는 온실 밖으로 나와야 했고, 그때의 나는 세상에 대한 알 수 없는 배신감만 들 뿐이었다.
지나친 보호는 때로, 세상을 견딜 힘을 빼앗는다. 내가 깨달은 건—인생의 진짜 힘은 부딪히고 흔들리며 생기는 거라는 사실이다.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나는 법을 배운 사람만이, 진짜 ‘자기 삶’을 살아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내 아이들에게 말없이 허락해주려 한다. 실수할 자유를. 상처받을 기회를. 자신의 선택을 후회해 볼 기회를. 그리고 부모도 교과서도 아닌 세상에게서 배우는 시간을. 부모라는 이유로, 내가 자꾸만 손을 뻗고 싶어질 때가 있다. 하지만 그 손이 그늘이 되지 않도록, 나는 내 마음을 조금씩 접는다.
피아니스트 손열음의 어머니는 강원도에서 국어교사로 재직하고 계셨기에, 손열음은 겨우 열두 살 때부터 가본 적도 없는 낯선 나라로 비행기를 혼자 타고, 연주복이며 악보까지 챙겨 혼자서 콩쿠르에 참가했다. 훗날, 그녀의 어머니는 이런 말을 남겼다. “부모가 자식의 삶에 개입하는 순간, 아이는 딱 부모만큼만 자랍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자식이라는 나무는 위로만 자라는 게 아닌, 옆으로도 가지를 뻗고, 어떤 향기를 품은 꽃을 피울지, 어떤 모양의 열매를 맺을지,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도 자신의 눈높이만으로 아이의 키를 재는 부모처럼 어리석은 존재가 있을까. 자칫하면, 아이는 부모보다 더 자라지도 못하고 부모의 그림자 안에서 시들어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내 아이들에게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혹은 내가 지나온 길을 다시 그들만의 경험으로 살아내게 하고 싶다. 그 아이들이 언젠가 비를 맞으며 웃고, 거센 바람 속에서도 자신만의 향기를 품고 피어나는 꽃이 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