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이레재

최근 나는 최신 맥북을 구입하기 위해 50만원, 100만원 가량의 가격차이를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 기존 컴퓨터의 1~2초 가량의 화면전환과 로딩속도를 기다릴 수 없어서였다. 그런데 큰 애가 학교에서 읽을만한 책을 추천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불과 몇년전까지만해도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겨 책을 읽는 것이 익숙했었는데, 이제는 책 한권마저 누군가의 관점으로 요약된 영상을 찾아보곤 해서, 최근에는 제대로 책을 읽은 기억이 없었다. 그래도 아직은 종이책을 읽는 아이들이 대견한 마음에 이것저것 읽어보라고 책장에서 내가 읽었던 책들을 꺼내 보여줬는데, 과거에 내가 연필로 밑줄 쳐 놓고, 인덱스를 붙여놓은 페이지들이 나왔다. 나는 큰 아이에게 책을 추천하다말고 방으로 들어와 내가 밑줄치고 메모했던 부분들을 골라 읽었다. 이것만큼 현실적인 타임머신이 없었다.


책은 30초짜리 쇼츠가 없다. 내가 원하는 핵심만 편집할 수도 없다. 100장, 200장에 걸쳐진 서사를 따라 글자마다 음미해야 단 5장의 클라이맥스에 비로소 도달할 수 있다. 책은 그런 점에서 전혀 세련된 도구가 아니지만, 세상이 바빠질수록, 책은 오히려 가장 절실한 쉼표가 되어줄 때가 있다. 그리고 그 쉼표는, 무언가를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라, 내가 나에게 '돌아가는' 시간을 준다. 책장을 넘기며 느리게 따라가는 문장들 사이에서, 나는 잊고 있던 감정을 만나고, 흩어졌던 생각들을 주워 담는다. 책이 주는 '느림'은 나를 조급함에서 구해주고, 책 속의 문장은 말없이 내 편이 되어준다. 그래서 나는 그 날 이후로, 다시 책을 펼치기로 했다. 세상이 아무리 빨라져도, 마음은 여전히, 단어 하나에 머물고 싶은 날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매일 5분이라도 책을 읽기로 했다. 눈으로 읽고, 마음으로 곱씹고, 그 하루가 남긴 문장을 노트에 적어두기도 한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저 다시 숨 쉬고 싶을 때, 책 속 문장과 단어들이 내게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오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다는 건, 결국 내가 나를 천천히 돌보는 일. 비록 세상은 바쁘고 빠르더라도, 단 한 사람만이라도 자기 속도를 지켜낼 수 있다면, 그건 이 시대에 충분히 의미 있는 저항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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