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의 순간

- 망설임을 예술적 선택을 바꾸는 힘

by 서히

작업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모르겠다’고 말하기 어려워지는 시점이 찾아옵니다.

충분히 고민했고, 여러 가능성을 검토했으며,

무엇이 문제인지도 대략 알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합니다.

아직 확신이 없어서라기보다, 오히려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시점의 망설임은 무지에서 비롯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선택의 결과를 이미 어느 정도 상상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생기는 필연적인 망설임입니다.

이 선택을 하면 무엇을 잃게 될지,

이 방향을 택하면 어떤 가능성들이 사라질지

이제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정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점점 더 무거워집니다.

결정은 언제나 ‘배제’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를 고른다는 것은 동시에 수많은 다른 길을 스스로 닫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결정을 미루며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조금만 더 생각해 보자”, “아직 열어둘 수 있잖아.”

하지만 그 ‘조금 더’의 시간은 대개 사유를 깊게 하기보다,

선택에 따르는 책임을 유예하는 방식으로 흘러가기 쉽습니다.


작업에서 결정이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기술적 판단을 넘어, 자기 자신에 대한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작업에서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두겠다는 것인지,

어떤 감각을 끝까지 밀고 가겠다는 것인지,

어디까지를 나의 세계로 인정하겠다는 것인지.

결정은 곧 나의 추상적인 세계관을 현실의 형태로 고정시키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많은 작업이 바로 이 지점에서 멈춰 섭니다.

가능성은 풍부하지만, 형태를 갖지 못한 채

영원히 ‘아직’이라는 상태로 남겨집니다.

그러나 작업은 결정되지 않는 한 결코 완성되지 않습니다.

결정이 없으면 방향도 없고,

방향이 없으면 깊이 또한 더 이상 자라지 못합니다.


결정은 완벽한 확신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결정은 불완전한 상태에서 감행됩니다.

충분히 고민했지만 여전히 불안하고,

여전히 다른 선택이 더 나아 보일 수도 있는 상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쯤에서 여기까지 가겠다”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용기.

결정이란 결국 확신의 결과가 아니라,

불확실성을 기꺼이 감당하겠다는 태도에 가깝습니다.


캔버스 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고칠 수 있을 것 같고 더 좋아질 여지가 남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어느 순간 우리는 붓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때의 멈춤은 포기가 아니라 책임입니다.

지금의 상태를 ‘나의 선택’으로 오롯이 받아들이겠다는 선언입니다.

결정은 작업을 멈추는 행위가 아니라,

작업을 나의 이름으로 묶어주는 행위입니다.

결정이 반복되면 망설임의 성격도 달라집니다.

처음에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망설임이었다면,

나중에는 감각의 미세한 차이를 가늠하는 신중한 망설임으로 바뀝니다.

무엇이 옳은지 몰라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더 나다운지 가려내기 위해 잠시 멈추는 상태.

이때의 망설임은 더 이상 장애물이 아니라,

선택의 정밀도를 높이는 섬세한 도구가 됩니다.


이 좌표는 “어떻게 더 잘할 것인가”가 아니라,

“지금 이 작업에서 무엇을 선택하겠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그 질문에 스스로 대답하는 순간,

작업은 더 이상 가능성의 안갯속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비로소 하나의 현실로, 단단한 세계로 굳어지기 시작합니다.


결정은 언제나 작은 상실을 동반합니다.

하지만 그 상실 덕분에 작업은 처음으로 자기만의 무게를 갖게 됩니다.

모든 길을 열어둔 채로는 어디에도 도착할 수 없습니다.

어느 한 지점을 단호하게 선택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자리에서만 볼 수 있는 고유한 풍경을 얻게 됩니다.




좌표 18. 결정

결정은 가장 완벽한 선택을 찾는 일이 아니라,
불완전한 상태를 나의 선택으로 받아들이는 용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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