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그렸는데 왜 허전할까요?

- 다시, 모르는 상태로

by 서히

하나의 작업을 정성껏 끝내고 나면,

우리는 잠시 길을 잃은 듯 멈춰 서게 됩니다.

오랜 시간 붙잡고 씨름하던 질문을 내려놓았고,

수없이 반복해 온 선택들을 하나의 형태로 묶어냈으며,

이제 작업은 나의 손을 떠나 세상 어딘가에서 조용히 누군가와 만나고 있습니다.

분명 홀가분해야 할 순간인데,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공허함이 차오릅니다.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하지?”


성취 뒤에 찾아오는 묘한 낯섦

작업을 완성하는 순간,

우리는 무언가를 얻는 동시에 무언가를 잃게 됩니다.
매일 아침 나를 작업실로 불러내던 간절한 이유,

화면 앞에 나를 묶어두었던 치열한 질문,

그리고 작업을 통해서만 겨우 견뎌낼 수 있었던 어떤 막막한 감정들.

그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해소되면서,

마치 그것들이 더 이상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듯한 묘한 소외감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완성 이후의 시간은 기쁨보다는 당혹감에 가까울 때가 많습니다.

이제 무엇을 붙잡아야 할지, 어디로 다시 돌아가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태.
잠시 ‘길 잃은 아이’가 된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비워낸다는 것, 다음 질문을 위한 자리

하지만 작업을 지속하는 사람은 결국 이 막막한 상태를 통과해야 합니다.
무언가를 완성했다는 달콤한 만족감에 머물고 싶어지는 마음을 내려놓고,

다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이전 작업에서 잘 통했던 방식이 이번에도 유효할 것이라는 기대를 접어두는 일.
이미 사람들에게 증명된 나의 언어를 스스로 다시 의심해 보는 용기.

비워낸다는 것은 무언가를 억지로 버리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음 질문이 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마음의 자리를 조용히 마련해 두는 다정한 준비에 가깝습니다.


시작은 언제나 공백에서

새로운 작업은 결코 화려한 완성의 연장선 위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것이 끝난 뒤 남겨진 이 막막한 공백 속에서 조용히 그 싹을 틔웁니다.

이전의 확신이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는 자리,

이미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감각이 문득 낯설게 느껴지는 그 찰나의 순간.

그때 우리는 비로소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된 상태에 놓입니다.

이 텅 빈 여백이야말로,

우리가 다시 꿈을 꿀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니까요.


이 좌표는
“다음에는 무엇을 만들 것인가”가 아니라
“나는 다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돌아갈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성취의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다시 빈손으로 돌아가는 용기.
완성 이후의 공허함을 결핍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위한 ‘여백’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작업은 다시 조용 히 숨을 쉬기 시작합니다.




좌표 29. 비움

끝낸다는 것은 단순히 마무리를 짓는 일이 아닙니다.
다시 겸손하게 ‘모르게 되는 상태’로 나를 데려다 놓는 일입니다.
끝낸다는 것은 끝나는 일이 아니라, 다시 모르게 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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