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tional Day에 쓰는 싱가포르
2018년 6월 12일 북미정상회담이 싱가포르에서 이뤄졌다. 양국의 지도자가 역사상 처음으로 싱가포르 남쪽 센토사 섬의 카펠라 호텔에서 만났다. 안전상의 이유로 평소에는 비행기도 잘 타지 않고 국제사회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은둔의 대명사가 된 북쪽의 지도자가 싱가포르에는 기꺼이 비행기에 몸을 싣고 왔다. 한밤중에 가든즈 바이 더 베이를 찾아 셀카까지 찍는 모습은 제법 신선한 충격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회담을 들었다 놓았다 하여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도 준비과정 초반부터 싱가포르는 기꺼이 회담장소로 받아들였다. 이 역사적인 사건의 무대를 제공한 싱가포르의 국민들은 자부심과 호기심으로 두 정상을 맞았다. 이보다 앞서 2년전에는 중국의 시진핑 주석과 대만의 마잉주 총통이 첫 양안정상회담을 가졌다. 치열한 국공내전 후에 한쪽은 중국 대륙에서 한쪽은 대만 섬에서 반 세기 넘게 냉전을 살아온 공산당과 국민당의 대표가 회담장소로 선택한 곳도 싱가포르였다. 서울보다 조금 큰 땅 덩어리에 수많은 외국인들을 합쳐 5백만명이 조금 넘는 인구를 보유했을 뿐인 작은 섬 싱가포르는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을 만들어 나가는 대화의 장으로 그 위상을 공고히 하고 있다. 그것도 단순한 대화가 아니라 수십년 동안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던 당사자들이 안심하고 웃으며 책상에 마주 앉을 수 있는 화해와 중재의 장으로서 말이다.
전 인류를 위협하는 핵무기를 두고 으르렁거리는 북한과 미국이나, 중화의 정통성을 다투는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도 분쟁의 해결을 위해 싱가포르를 찾지만, 트레이더들도 다툼이 있으면 싱가포르를 찾는다. 곡물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무역계약에는 준거법(Governing Law)과 중재(Arbitration) 조항이 있다. 거래 과정에서 분쟁이 생겨 당사자들끼리 도저히 해결이 안될 때 어느 나라 법을 적용하여 문제를 해결할 것인지 정하는 것은 준거법 조항이다. 계약 당사자의 의무와 권리가 무엇인지, 이에 따른 양자의 귀책사유는 어떻게 되는지, 귀책 사유에 따라 얼마나 어떻게 배상을 해야하는 지 등에 대해 나라마다 법적 해석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같은 상황을 두고도 기준이 되는 법이 무엇이냐에 따라 문제의 결과가 적잖이 달라질 수 있다. 또한 국경을 넘나드는 무역에서 자국 업체에 유리한 법적용과 집행에 대한 우려 때문에 계약당사자들은 서로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제3국의 법을 준거법으로 선택한다. 예를 들어, 한국 업체와 중국 업체가 무역계약을 체결할 때에는 한국법도 중국법도 아닌 제3국의 법을 준거법으로 선택한다. 이 때 가장 인기가 많은 법으로 꼽히는 것 중 하나가 싱가포르 법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무역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싱가포르의 법조문을 하나하나 읽어본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마는, 싱가포르 법에 대해서는 막연한 느낌일지라도 그 합리성과 객관성을 크게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나도 싱가포르의 법체계는 영미법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정도만 알고 있을 뿐, 중국법도 싱가포르법도 직접 찾아 읽어본 적은 없으나 중국법을 준거법으로 삼는 것은 찝찝하지만 싱가포르법은 거리낌없이 받아들인다. 아마 신입사원 교육 때부터 받은 영향이 큰 것 같다. 그러나 싱가포르법에 대한 신뢰와 별개로 모든 문제를 법원에서 해결하자면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든다. 이는 패소하는 쪽은 물론 승소하는 쪽도 부담스럽다. 중재는 현지 법원까지 가고 이에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을 서로 아끼기 위해 국제무역에서 많이 사용하는 방식이다. 중재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면 분쟁에 대한 판단을 법원이 하지 않고 제3의 중재인 또는 중재기관이 개입하여 판단을 내리고 분쟁당사자들은 이에 복종한다. 일반적으로 법원에 가는 것보다 그 과정이 저렴하고 신속하다. 국제무역에서 중재기관으로도 역시 인기가 많은 것이 SIAC(Singapore International Arbitration Centre)으로 잘 알려진 싱가포르 국제중재센터다. 김정은과 트럼프가 싱가포르를 찾듯이 오늘도 세계 각지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싸움을 해결하기 위해 돈을 내고 싱가포르를 찾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앞서 싱가포르는 제네바와 더불어 국제곡물교역의 허브라고 하였는데, 중립국 스위스의 제네바 또한 각종 국제기구가 모여 있고 제네바 회담 등 세계사의 굵직굵직한 정치적 사건들의 무대가 되었던 사실을 생각하면 두 도시의 공통점이 더욱 두드러진다.
이런 중립성은 싱가포르 사회의 다양성에 기반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싱가포르에는 여러 문명이 공존한다. 지리적으로는 동남아시아에 속하며 아세안(ASEAN)의 일원인 싱가포르에는 중국, 인도, 이슬람, 서구 문명이 복잡하게 착종되어 있다. 인종적으로는 한인(漢人)이 다수를 이루나 어느 한 인종이나 문명이 타인종과 문명을 억누르지 않고 평화롭게 공존한다. 시내 중심가의 도교 사원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무슬림 모스크가 있고 그 옆에는 또 성당과 교회가 있다. 학교 버스에는 피부색이 다른 아이들이 재잘재잘 떠들며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지 얼굴에서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싱가포르는 이 땅의 법과 규칙을 준수하는 모든 민족과 인종의 나라이면서 그 어느 민족과 인종만의 나라도 아니다.
사회의 다양성이 가장 피부에 와 닿는 방식으로 현실에 구현된 것은 음식이다. 식도락의 천국으로 특히 우리나라 여성들의 많은 사랑을 받는 싱가포르에서는 세계 각지의 별미를 날마다 맛볼 수 있다. 제이미 올리버가 운영하는 이탈리아 레스토랑이나 미슐랭 3스타도 싱가포르에서 만날 수 있는 별미이지만 맛도 맛이거니와 싱가포르 사회의 단면까지 살필 수 있는 곳은 호커 센터(Hawker Centre)다. 다양성의 거대한 용광로 같은 호커센터에는 중국, 인도, 태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한국, 일본 등 국적이 다른 음식을 저렴한 가격으로 파는 작은 가게들이 따닥따닥 붙어있다. 이곳에는 식당마다 자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어서 각자 먹고 싶은 음식을 사와서 공용 좌석과 테이블에 앉아 밥을 먹는다. 밥시간에 사람은 많고 좌석은 부족하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들끼리도 한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밥을 먹는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보통 야외에 있는 호커 센터는 냉방이 되지 않아 무척 후텁지근하지만, 뜨거운 열기 속에 이처럼 땀 흘리며 등을 맞대고 앉아 서로의 음식을 눈으로 보고 입으로 먹으며 서로에 대해 알게 된다. 고기를 먹지 않는 인도인들은 형형색색의 채식을 하고, 히잡을 쓴 여성들은 신이 ‘허용’한 음식을 먹고, 반드시 밥에 김치가 필요한 한국사람들은 김치를 먹을 수 있는 곳이 호커 센터다. 아무도 마늘냄새가 난다고 김치를 빼앗지 않고 히잡을 쓴 여성의 면전에 삼겹살을 들이대지 않는다. 각자 행복하게 허기진 배를 채우고 다시 각자의 일터로 떠난다. 잠시 한국음식에 대해 얘기하자면 싱가포르 역시 한류의 영향으로 한국음식의 인기가 좋다. 한국음식은 호커센터는 물론 외식업계 전반에서 제법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한국회사들이 많이 모여있는 탄종파가(Tanjong Pagar) 근처에서는 전날밤 광어회와 들이킨 소주의 숙취를 시원한 굴메생이국과 ‘구수한’ 냄새의 청국장으로 풀 수 있을 정도다.
싱가포르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토록 '더럽다'는 중국인들이 인구의 다수를 이룬다. 하지만 작은쓰레기도 찾아보기 어려운 거리의 청결함을 마주한 관광객들은 감탄을 하느라 입에 침이 마르지 않는다. 고온다습한 날씨에 실외에서 음식을 조리하는 호커 센터에서조차 그 흔한 바퀴벌레를 찾기 어렵다. 오히려 거리를 침과 담배꽁초로 더럽히는 것은 술 취한 한국인 주재원들과 관광객들이다. 싱가포르에는 세계 3대 할랄 식품 인증기관이 있을 정도로 '자살테러와 강간을 일삼는' 무슬림들도 많다. '성폭력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인도 사람들도 많다. 도대체 더럽고 무서워서 사람 살 곳이 될까 싶은데 트럼프와 김정은이, 시진핑과 마잉주가 전 세계 많고 많은 도시 중에 안전을 보증하는 곳이 싱가포르다. 그래서일까? 싱가포르의 밤거리에는 방금 식사를 마치고 아름다운 야경을 카메라에 담기 바쁜 여성관광객들이 많고 마리나베이 샌즈호텔의 인피니티 풀에서 육감적인 몸매를 자랑하는 반라의 한국 여성들이 오늘도 인스타그램을 가득 채운다. 만약 객가(客家) 출신의 한인 리콴유가 화교들이 사회의 절대 다수를 이룬다고 말레이시아연방에서 '독립을 당한' 싱가포르를 중국인만의 나라로 만들었다면 지금 이 나라의 모습은 어땠을까? 텔레비전 속 싱가포르 건국기념일 행사 중계를 보며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