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9월, 파주에서 군의관 생활을 시작한 지 반년 정도가 지났을 때 나는 대화에 목말라 있었다. 임진각 통일대교를 건너야 도착하는 복무지에서 나는 이틀에 하루, 한 달에 두 번의 주말을 온전히 그곳에서 먹고 잤다. 풋살을 하다 매번 발목을 삐어서 오는 스무 살짜리 용사들과 귀뚜라미, 개구리 소리와 함께 지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레지던트 시절 간절히 바랐던, 햇빛 드는 조용한 방의 창가에서 해가 질 때까지 천천히 책을 읽는 여유는 매일의 일과가 되었다. 혼자 읽은 책들은 책상 한 켠에 한 권, 두 권 쌓였고 나는 다 써가는 노트 다음에는 어디에 독후감을 쓸지 고르는 일로 설렜다.
어느 주말, 산들거리는 날씨에 열어 둔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귓가를 지나 펼쳐 둔 책장 위로 스쳐갔다. 간지러웠다. 입이 간지러웠고 귀가 간지러웠다. 가슴이 뻐근하고 저릿해져서 어디론가 가고 싶었다. 내 느낌과 생각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다. 같은 책을 읽은 다른 이들의 느낌과 생각이 궁금했다. 책을 두고 이야기를 나눈다는 여러 모임들을 찾았다. 적당히 낯설면서도 흥미를 유발하는 모임을 선택했다. 첫 책으로 컨테이너 박스의 역사를 다룬 ‘<더 박스>를 읽는다는, 이름 또한 특이한 ‘트레바리 - 취향있냥’에 나는 그렇게 발을 들였다.
4개월 동안 <더 박스>에 이어서 <상품의 시대>, <장인의 공부> 그리고 <헤비 듀티>까지 ‘취향있냥’의 사람들과 함께 읽고 독후감을 썼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클럽장인 재용님의 이름 앞에 붙은 큐레이터라는 직함은 마치 잘 골라서 잘 배치하여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람이라는 뜻인 것만 같았다. 당혹스러웠던 컨테이너의 역사 이야기 다음에는 그렇게 운반된 상품들이 우리의 손에 들어오기까지의 유혹의 과정을 살펴본 <상품의 시대>를 읽었다. <장인의 공부>는 광고로 매개된 상품이 아니라 목공이라는 작업을 통해 물건을 스스로 창조해내는 것의 즐거움과 충만함, 그리고 삶의 동반자로서의 물건을 말하는 책이었다. 마지막 책이었던 <헤비 듀티>, 추웠던 파주의 12월을 함께 보낸 그 책은 복식의 한 형태에 대한 매뉴얼이면서 동시에 ‘아무거나’ 입지 않고 ‘아무거나’ 먹지 않으며 ‘아무 데서나’ 살지 않는 삶의 태도를 설파했다.
네 번의 독서, 네 번의 모임이 퍼즐처럼 맞추어지며 드러난 ‘취향있냥’의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선택을 하는 존재인 ‘나’는 누구인가? 선택을 위해서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취향은 기준이 가리키는 방향이다. ‘취향있냥’의 질문은 기준을 가졌느냐는 질문이다. 선택의 기준은 교육에 의해 학습되기도, 주변에 의해 강요되기도, 광고에 의해 세뇌되기도 한다. 무엇이 주입된 것이고 무엇이 오롯이 자신의 것인가? 무엇이 좋은 선택이고 무엇이 나쁜 선택인가? ‘취향있냥’의 질문은 거대했고 나는 질문과 대답, 고민의 즐거운 혼돈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느꼈다.
파주의 추위는 대단했다. 차 앞 유리에 엉겨 붙은 성에를 긁어내는 데 여념 없던 겨울이 지나 5월이 왔다. 나는 한 해 동안 최전방에서 근무한 덕에 후방으로 옮겨 올 수 있었다. 5월부터 지낼 곳은 고양시의 벽제라는 곳이었다. 새 근무지는 군병원이었는데 한적하고 조용했던 전 근무지와 달리 북적거리는 곳이었다. 더 이상 발목을 삐어 내게 오는 환자는 없었으나 원래의 전공인 내과에 맞춰서 소화불량이나 감기, 드물게는 폐렴으로도 용사들은 나를 찾았다.
나는 군복이 아닌 의사 가운을 입고 진료를 보기 시작했다. 환자를 보는 일은 많은 대화가 필요한 일이다. 외래가 있는 날이면 나는 하루 종일 듣고 말했다. 3분마다 반복되는 “어디가 아파서 왔어?” “목이 아파서 왔어요.” “춥거나 한기가 들지는 않아?” “어, 오늘 새벽부터 그래서 잠도 못 잤어요.” 같은 대화들은 정보의 취득과 전달에는 유용했지만 설명하기 힘든 아쉬움과 갈망을 남겼다. 폐렴에 걸려 입원한 환자들과는 그래도 제법 오래 얘기를 나누었다. 나는 부산 출신인데 너는 어디서 왔냐부터, 피차 의도와는 무관하게 군대에 오게 된 두 사람의 입장에서 나누는 대화들은 내게는 즐거우면서도 치료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좋은 치료를 위해서는 좋은 대화가 필요했다. 좋은 대화는 깊은 이해, 다양한 경험에서 비롯하리라 생각했다. 달라진 환경에 반응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고, 내가 ‘미술아냥’을 신청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물론 다른 모임이 아닌 ‘미술아냥’을 신청한 이유는 그곳에 좋은 큐레이터가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재용님은 ‘취향있냥’에서보다 더욱 전문적인, 외부인에게는 접근하기 어려웠던 세상을 역시나 ‘잘 골라서 잘 배치한 후’ 우리를 안내했다.
첫 번째로 읽은 책은 <미술관에 가면 머리가 하얘지는 사람들을 위한 동시대 미술 안내서>였다. 소위 ‘예술계’의 내부인인 저자가 위트 있는 일러스트와 시니컬한 문장, 따뜻한 시선으로 “이리 들어와!” 손짓하는 걸 흥미롭게 따라 들어가게 되는 책이었다. 그렇게 손님으로 들어와서는 다음 책, <어쩐지 미술에서 뇌과학이 보인다>이 건네주는 렌즈, 즉 과학의 렌즈를 통해 미술을 바라보았다. 추상미술의 모호함은 관객의 기억, 경험과 연관되면서 새로운 신경 연결을 만들어낸다는 이야기, 미술의 완성은 관객의 머릿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이야기는 부담스럽지만 견고한, 무겁지만 튼튼한 신발처럼 장착되었다. 세 번째 책은 그 ‘미술아냥’의 하이라이트였다고도 할 수 있는데, <동시대 이후: 시간-경험-이미지>는 아주 세련되고 정밀한 철학 렌즈였다. 철학의 눈으로 음악, 문학, 사진, 영화 등을 들여다보는 그 책에서는 현대 예술(혹은 상업)을 지배하는 두 강박관념, 기억과 경험을 비판했다. 우리는 지금, 여기를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과거나 다른 시간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말이었다(예를 들어 하루 종일 <응답하라> 시리즈를 본다면 그건 언제를 살고 있는 것일까?). 마지막 책, <레트로마니아>는 과거에의 집착, 복고의 경향을 음악의 렌즈를 통해 들여다본 후 깊은 반성을 유도했다. 왜 우리는 편안하고 확실한(혹은 그렇게 보이는) 과거에 안주하려 하는가? 왜 우리는 미래로 향하는 희뿌연 길을 걸어가기를 두려워하는가? 우리는 미술을 찾으러 책 속으로 들어갔다가 과학과 철학, 음악의 렌즈를 통해 오히려 스스로를 반성하는 길로 접어들었다.
‘취향있냥’이 던진 질문이 ‘세상 속 내 존재’를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면 ‘미술아냥’의 질문은 현대미술의 화두들을 토대로 눈을 뜨게 만들어 주변을 밝히는 것이었다. ‘취향있냥’은 있는 것 - 존재의 문제를, ‘미술아냥’은 아는 것 - 인식의 문제를 제기했다. 그것은 나와 내가 선 땅, 걸어온 길과 걸어가야 할 길을 어렴풋이 비추는 등불 같은 것이었다. 혼자 지내던 파주에서 골몰한 ‘취향있냥’의 질문은 절실했고 환자들로 둘러싸이게 된 고양에서 ‘미술아냥’의 질문은 내 대화와 이해의 폭을 넓혔다.
어린 아기가 눈을 깜박이고 손을 조물조물거리며 입을 웅얼거리는 것은 자기 몸을 깨닫는 과정이다. 아기는 눈에 비친 엄마를 바라보며 타인의 존재를 깨닫고 자기 입에서 어쩌다 나온 소리에 탄성을 지르며 웃는 그 사람을 보며 교감의 존재를 깨닫는다. 아기는 고개를 가누기 시작하고 자기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바라본다. 아기는 배를 밀며 기다가 네 발로, 두 발로 서면서 세상의 탐험에 나선다. 물건을 만지고 싫고 좋음을 표현하며 자신 주변을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나간다. 아기는 변하는 존재에서 변화시키는 존재가 된다.
‘취향있냥’과 ‘미술아냥’ 다음은 무엇인가? 성장의 과정은 세상을 접촉하는 나의 면적이 넓어지는 과정이다. 나와 접촉한 세상을 티끌만치나마 나의 취향으로 바꾸는 것, 그것이 가능하다면 ‘좋은’ 것이 되도록 애쓰는 것이 인간이 성장하는 방법이다. 존재와 인식 다음은 행동의 순서다. ‘취향있냥’에서 ‘미술아냥’으로 이어진 질문은 그래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즉 ‘어떡하냥’의 질문으로 나아간다.
‘미술아냥’이 끝난 뒤 다른 모임에 참가하면서도 수시로 ‘미술아냥’에서 다루는 책이 무엇인지 살폈다. 두 번째로 선정된 책에 눈이 갔다. 소설가 알랭 드 보통과 철학자 존 암스트롱이 함께 쓴 <영혼의 미술관Art as Therapy>이었다. 단호한 세 단어의 영어 제목은 마치 미술이 가진 치유의 힘을 믿는 신념의 표현 같았다. 알랭 드 보통의 이전 작품, <프루스트는 어떻게 당신의 삶을 바꿀 수 있는가How Proust Can Change Your Life>의 질문이 이 책에서 “미술은 당신의 삶을 바꿀 수 있다”라는 대답으로 이어지는 듯했다.
책의 구성은 명료했다. 단 두 페이지짜리의 서문에 책의 핵심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을 담았다. 왼쪽 페이지에는 “미술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라는 질문이, 오른쪽 페이지에는 “미술은 인간을 위한 도구다.”라는 대답이 적혀 있다. 인간이 인체만으로는 동물의 힘줄을 끊지 못해 칼이라는 도구를, 손만으로는 물을 오래 담아 두지 못해 물병이라는 도구를 발명했듯 인간의 발명품인 예술 또한 모종의 사명을 띠고 세상에 나왔다는 것이다. 예술은 불가해한 것들 - 인간의 마음과 감정, 세상의 부조리와 혼돈 - 을 이해하고 이해한 바를 표현하고자 노력하는 몸짓이다. 혼자서는 도저히 언어를 부여할 수 없는 감정에, 수시로 찾아오는 허무와 우울에, 늙음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삶 속에서 이것을 이어가야만 할 이유가 희미해질 때 예술은 안갯속을 먼저 걸어간 사람의 흔적이 된다. 아른거리는 흔적 속에서 작가들은 우리에게 손을 내민다. 우리는 필요한 손들을 찾아 잡고 걸어 나간다. 우리에게 주어진 무수한 몸짓의 기록들은 찾아서 꽉 붙잡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의 것, 인간의 도구가 된다.
짤막한 서문에 이어서 다섯 개의 장이 펼쳐진다. 가장 비중이 큰 첫 장의 제목은 ‘방법론Methodology’이다. <영혼의 미술관>이 제시하는 방법론은 7개의 렌즈다. 좋은 삶을 위해서는 필수적이지만 우리가 놓치고 살아가는 7개의 요소들에 대해 예술은 새롭게 바라볼 렌즈를 제공한다.
우리의 기억은 불완전하다 : 예술은 휘발하는 기억과 경험을 간직하는 도구다.
우리는 쉽게 좌절한다 : 절망은 도처에 있으나 희망은 드물고 귀하다. 예술은 세상이 어떠한지 뿐만 아니라 어떠해야 하는지, 어떤 것이 좋은 것인지를 말하는 희망의 전달자다.
우리는 슬픔에 익숙하지 않다 : 슬픔과 고통, 상실과 허무는 피할 수 없는 삶의 요소임에도 우리는 그것을 마주하길 두려워한다. 예술은 삶에서 슬픔의 위치를 드러내고, 그것을 품위 있게 살아내는 방법을 보여준다.
우리는 편향되기 쉽다 : 예술은 다양한 시각과 그 사이 중용의 위치를 보여줌으로써 균형 잡힌, ‘좋은’ 삶의 지점을 가리킨다.
우리는 스스로를 잘 모른다 : 우리는 투명하지 않다. 남에게 나를 표현하는 것은 물론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예술은 그 모호함에 언어나 그림 등의 형태를 부여하여 스스로를 이해하는 일을 도운다.
우리는 낯선 것을 두려워한다 : 예술은 낯선 것, 타자의 존재를 드러낸다. 스스로를 지키고자 하는 방어기제 - 두려움, 회피 - 를 넘어서기 위해 예술은 때로 우회적으로, 때로는 충격의 방법을 동원해 우리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성장시킨다.
우리는 일상에 무감해지기 쉽다 : 반복되는 일상의 지루, SNS와 광고 등에서 현란하게 들이미는 화려함 사이에서 우리는 어쩌면 삶이란 ‘다른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예술은 일상을 감지하는 새로운 시선을, 그 소중함을 존중하는 자세를 제시한다.
<영혼의 미술관>은 인간의 결핍을 어루만지는 예술의 속성을 말한다. 7개의 렌즈는 각각의 결핍에 대응한다. 이제 이들을 길잡이 삼아 우리는 미술관에 입장한다. <영혼의 미술관>은 하나의 미술관과도 같은 책이다. 다만 두 저자는 미술사조나 시대 구분에 따라 전시관을 나누지 않고 인간의 관심에 따라 전시관을 구분했다. 입구에 해당하는 ‘방법론’에 이어지는 네 개의 장은 각각 사랑, 자연, 돈, 정치라는 제목을 가진 전시관들이다.
‘사랑’ 전시관에서는 어떻게 하면 사랑을 찾고, 충만한 사랑을 할 수 있으며 그것을 오래 이어갈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전시관의 서사는 작품에 담긴 예술가들의 고민과 모색, 대답으로 이루어진다. 사랑의 과정은 험난하고 난파의 위협은 실재적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해를 - 사랑을 - 이어나가야만 하는 인간의 운명은 프레드릭 에드윈 처치의 <빙산The Iceberg>으로 표현된다.
‘자연’ 전시관에서는 생과 사의 무대로서의 자연과 거기에 출연하는 배우인 인간을 보여준다. 자연은 생명의 환희를 자극하기도, 죽음의 불가피성을 말없이 보여주기도 한다.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분으로서 자연은 피할 수 없는 삶의 조건이다. 열락과 공포 사이에서 담담하게 삶의 조건을 응시하게 해주는 것 또한 예술이다. 검은 바다 위를 덮은 안개를 정직하게 바라보는 히로시 스기모토의 <북대서양, 모허 절벽>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한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진다.
‘돈’ 전시관부터는 <영혼의 미술관>이 지어진 의도가 드러난다. 저자들은 여기까지 쌓아온 논리와 신뢰를 바탕으로 오늘날 미술관은 어떠해야 하는지, 비평가와 큐레이터의 역할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주장을 펼친다. 그들 주장의 중심에는 ‘취향’이라는 화두가 있다. 광고와 SNS가 우리 취향을 호도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좋은 취향과 나쁜 취향을 구분할 수 있는가? 무엇이 좋은 취향이며 무엇이 나쁜 취향인가? 돈을 축적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이는 수두룩하지만 돈을 ‘잘’ 쓰는 방법을 알려주는 이는 드물다. 자본주의는 오직 그 구성원들 - 소비자들 - 의 취향만큼만 좋거나 나쁠 수 있을 뿐이다(p.155). 소비자들의 취향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뀔 때 돈이 몰리는 곳 또한 바뀐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배의 키를 스스로 잡게 되는 것이다. ‘돈’ 전시관에는 메디치가의 후원을 받은 미켈란젤로의 <메디치 예배당 : 밤과 낮>과 호주의 부호가 지은 <프리다무르 저택>이 비교 전시되어 있다. 하나는 오랜 세월을 살아남으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지만 하나는 거슬리다 못해 철거되었을 때 아무에게도 애도받지 못했다.
이어서 들어간 마지막 전시, ‘정치’ 전시관은 알랭 드 보통 - 존 암스트롱 큐레이션의 백미다. 그들은 프로파간다로서의 예술을 주장한다. 과거의 프로파간다는 종교 혹은 이념에 의해 악용되면서 믿음을 강요하는 매체로 전락했다. 오늘날 대중은 얼핏 보기에는 아무것도 강요받지 않고 선택의 자유를 누리는 듯하다. 그러나 주어진 자유로부터 우리에게 유익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은 자유를 쟁취하는 일과는 전혀 별개의 일이다(p.221). 우리의 자유를 두고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려는 유혹은 무수히 많다. 예술은 그러한 세상의 유혹 중에서 바람직한 방향이 어느 쪽인지를 가리켜야 한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이며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따라서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말해야 한다.
‘정치’ 전시관 정면에는 봉사자들 무리 앞에서 싱긋 웃고 있는 한 예술가의 사진이 있다. 티노 세갈은 영국인들에게 부족한 것 - 진지하고 솔직한 대화 - 이 무엇인지 드러내는 것을 넘어서 직접 해결하려는 시도를 한다. 대화 기술을 연습한 봉사자들이 테이트 모던을 찾은 관람객들에게 한 명씩 다가가 말을 건다. 자기의 삶을 얘기해주고 관람객의 삶은 어떠한지 묻는다. “어딘가에 소속된다는 느낌을 받아 본 적이 있나요?”, “‘도착하다’라는 말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를 갖나요?”, “당신은 무엇이 무서운가요?”. 오고 가는 질문과 대답 속에서, 진실한 대화 속에서 예술은 예술을 넘어서 행동과 변화가 된다.
작년 9월에서 올 9월 사이에 내 삶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창문으로 햇볕이 드는 여유로운 3평짜리 진료실이 북적거리는 군병원으로 바뀌었다. ‘취향있냥’과 ‘미술아냥’을 거치면서 가까워질 일 없다고 생각했던 예술계의 사람들과도 알게 되고,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일련의 책들을 읽고 토론을 하면서 내가 선 자리, 내가 가야 할 방향 같은 것들이 뚜렷해졌다. 마치 마술과도 같은 어떤 큐레이션을 거친 느낌이었다. <영혼의 미술관>이 알랭 드 보통과 존 암스트롱이 큐레이션한 전시라면, ‘취향있냥’과 ‘미술아냥’ 또한 큐레이션의 산물인 것이다. 좋은 안내자 - 큐레이터를 만나는 일은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인간은 도움 없이 혼자서는 결코 성장할 수 없는 동물이다. 어미새가 반쯤 씹어 부드럽게 만든 먹이를 아기새에게 전달하듯, 얼핏 불규칙하고 울퉁불퉁한 세상의 이야기들을 재정렬하여 - 잘 고르고 잘 배치하여 - 입에 넣어주는 일은 성장을 위해 필수적이다.
나는 예술의 한복판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한 사람을 바꾸는 예술은 세상을 바꾸는 예술이다. 아기는 부모의 도움으로 성장하여 변하는 존재에서 변화시키는 존재가 된다. 이제 나는 세상을 바꾸려 내일도 출근한다. 거기에도 무수한 세계가 있지 않은가. 어제 39도까지 열이 났다던 준영이, 목이 아파서 잠을 잘 못 잤다는 재형이, 설사를 하루에 열 번씩 하다가 이젠 좀 살만하다는 용찬이. 나는 그들과 대화를 나누러 간다. 비록 연민과 공감, 희망과 응원을 목소리에 담는 일이 버거울지라도 나는 예술의 방법론을 빌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취향있냥'과 '미술아냥' 다음으로 찾아온 '어떡하냥'이라는 화두는 그래서 미술관 밖의 삶을 말한다. <영혼의 미술관> 저자들의 말마따나, 미술관은 잘 살아낸 삶의 서곡에 불과하다. 예술가들이 사랑했던 가치들을 우리 또한 사랑할 수 있고 그것을 세상에 투영해 내보일 수 있을 때, 그럴 때야말로 치유로서의 예술은 가능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