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묻노니, 자라는 것이 두려운가. 깎아낸 손톱이, 잘려나간 머리카락이, 쓰레기통으로 버려지는 시간들이 두려운가. 벌초를 하러 찾아간 선산의 묘가 무성한 수풀 아래로 사라져 버린 모습이 두려운가. 말도 제대로 못 하던 아기가 어느덧 탄탄한 근육을 빛내는 청년이 되어 번화가를 활보하는 모습이 두려운가. 어릴 적 상상했던 나의 미래가 지금의 나와는 너무나 다른 것이 두려운가. 그럼에도 붙잡을 수 없고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엄혹함이 두려운가. 알지 못하는 미래가 두려운가, 예상 가능한 미래가 두려운가. 시간은 흐른다는 것이 나는 두려운가.
<레트로 마니아 : 과거에 중독된 대중문화 Retromania>는 오늘날 대중문화의 복고적 경향에 대해 말하는 책이다. 저자 사이먼 레이놀즈는 음악 평론가로 포스트 펑크나 전자 댄스음악 등 진보적인 음악 형식을 주로 다루며 글을 쓰는 사람이다. 동시에 그는 영국의 레이브 문화에 깊이 빠져들었던 왕년의 음악 청년이기도 하며, 스스로가 레트로 애호가이자 음반 수집광이기도 하다. <레트로 마니아>는 레이놀즈의 자리에서 살펴본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대중음악 탐구이며(각각은 챕터의 이름이기도 하다) 각 시대의 뒤에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과거, 즉 ‘어제의 과거’, ‘오늘의 과거’ 그리고 ‘내일의 과거’의 탐색이다.
레이놀즈는 각 시대의 탐색에서 흥미로운 공통점을 발견한다. 과거를 향한 동경, 노스탤지어라고 부를 수 있는 순수했던 시절을 향한 그리움은 어느 시대에든 존재한다는 것이다. 21세기의 첫 10년을 장식한 ‘재-’의 잔치, 재탕, 재발매, 재연, 재조명, 재결합, 재활용, 재조합 등은 오늘의 눈으로 본 빛나는 과거다. 어제의 눈으로 본 과거도 있는데, 쳇바퀴처럼 돌고 도는 패션의 유행이라든지 우디 앨런의 <미드나잇 인 파리>의 두 주인공, 1920년대를 동경하는 2010년의 길과 1890년대를 동경하는 1920년의 아드리아나, 심지어 1890년대로 떠난 두 주인공이 만난 드가와 고갱이 르네상스를 동경하는 모습은 채워질 수 없는 향수의 본질을 보여준다. 순수로 빛나는 어제나 오늘의 과거와는 대조적으로, 내일이라는 시간 속에 엉겨 붙은 과거는 형체가 흐릿한 유령의 모습이다. 상상력이 고갈되어 ‘낡은 미래’만을 전시할 뿐인 디즈니의 투모로랜드에서 풍겨오는 지루와 우울은 자기 생의 허망함에 지상을 떠나지 못하는 지박령을 닮았다.
Image from <The Rings of Saturn>, W.G. Sebald
순수의 시대. 무엇이든 될 수 있었던 때 묻지 않은 시간. 가능성의 어린 날. 다양한 미래를 내포하던 청춘의 갈림길. 그리고 프로스트의 시에서처럼 “몸이 하나니 두 길을 다 가 볼 수는 없어” 선택한 길. 노스탤지어의 아릿함은 갈림길에 우두커니 남아 있는 나와 이미 멀리 걸어온 나 사이의 찢어짐에서 비롯한다. 가보지 못한 수많은 길로 떠난 나와, 지금 여기에 있는 나 사이의 간극에서 그리움과 회한은 증폭한다. 가능성의 다중우주는 하늘 가득 가지를 뻗어나간 나무의 모습이다. 그 가능성의 나뭇가지들을 거슬러 나무줄기로, 기둥으로, 뿌리로 돌아가게 만드는 힘, 과거로 우리를 당겨 대는 힘은 ‘자라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자라는 것은 늙고, 늙는 것은 죽는다. 죽은 것은 사라진다. 그리하여 무성한 수풀을 두려워하고 자라나는 머리카락과 손톱을 두려워하며 탄탄한 근육을 두려워하는 것은 소멸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레트로’ 경향의 근원에는 성장의 두려움 혹은 소멸의 두려움, 이름 붙이자면 사라지는 것을 직시하지 못하는 ‘죽음 외면Aversion to Death’의 요소가 자리한다. 녹음 기술과 사진 기술의 발전은 그러한 ‘죽음 외면’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사랑했던 사람이 죽은 뒤 그 음성을 보존하고 영원히 곁에 두기 위해 에디슨이 발명했다던 축음기는 탄생에서부터 죽음의 본질을 외면한다. 현실의 데스마스크라고도 할 수 있는 사진은 오늘날 죽음의 아우라를 거의 잃었다. 인스타그램을 떠도는 어느 사진에서도 ‘나는 머지않아 죽소’라는 메시지는 찾기 어렵다. 아날로그 필터를 잔뜩 입힌 레트로 감성 사진이나 육감적인 신체를 은근히 드러내는 소위 인플루언서들, 어리고 귀여운 동물들의 사진들에서도 ‘죽음 외면’은 작동한다.
두려움을 일으키는 데다 인기를 끌지 못하고 돈조차 되지 않는 ‘평범한’ 죽음은 그래서 우리 곁을 떠났다. 아니, 그를 애써 외면했던 우리에 의해 죽음은 격리되었다. 도시의 불빛에서 쫓겨난 죽음은 이제 어느 병원의 창백한 형광등 아래서만 존재한다. 마치 상실과 자연스러운 슬픔이 전염이라도 되는 듯, 우리는 병원에 죽음을 밀어 넣고 잊어버리려 한다. 다만 계시처럼 파고드는 어떤 사건들에 의해 우리는 늘 우리 곁에 있었던 그것의 입김, 차가운 숨결을 느끼고 소름이 돋아날 뿐이다.
평범한 죽음에 대한 계시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시간 감각 - 그것이 한쪽으로만 멈춤 없이 흐른다는 것, 인간의 시간은 유한하다는 것 - 에서 비롯한다. 광적인 음반 수집가이기도 한 레이놀즈의 고백은 그런 전율의 순간을 포착한다.
“그처럼 엄청나게 축적된 음악은 무의식적 압력을 행사한다. 새로 찾은 음악은 고사하고, 좋아하는 음악조차 모두 들을 만큼 넉넉한 여생이 있는지 궁금해진다. 음악광에게 중년의 위기란 선반에 쌓인 그 모든 잠재적 쾌락이 기쁨을 주기보다 오히려 죽음의 조짐처럼 느껴지는 순간을 말한다.” - p.107
예상 가능한 죽음의 확실성과 그것이 언제 찾아올지 모른다는 불확실성 사이에서 삶은 지속한다. 지나온 삶의 가능성들에 대한 아쉬움과 언제 끝날 지 모르는 생에 대한 불안함 사이에서 삶은 위태롭다. 무한하지 않은 삶이라는 제약 속에서, 상실과 슬픔이 수시로 우리를 추궁하는 흔들리는 외줄 위에서 삶은 춤을 추는 듯한 모습이다.
그렇다고 다시 시작한 곳으로 돌아갈 것인가. 마찰이 없었던 이상적인 공간, 그러나 그 때문에 걸을 수도,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었던 그 공간으로 돌아갈 것인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 중 한 대목을 옮겨 보자면,
"우리는 마찰이 없는 미끄러운 얼음판으로 들어선 것이다. 그리고 마찰이 없는 상태는 어떤 의미에서는 이상적이지만,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걸을 수 없게 된다. 우리는 걷고 싶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마찰이 필요하다. 거친 땅으로 돌아가자!"
언젠가 식물이 동물의 세상을 뒤덮는 날이 올 것이다. 거대한 건물이며 돌아가는 자동차 바퀴며 시끄러운 도시의 불빛들이며 모두 자라나는 수풀과 덩굴에 파묻혀 사라지는 날이 올 것이다. 식물의 압승은 죽음의 압승처럼 명백하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므로 죽을 때까지 동물의 삶을 살아야 한다. 식물과 달리 동물은 반응한다. 때리면 화낼 줄 알고 기쁘면 춤출 줄 안다. 반응하는 것이야말로 지금을 사는 동물의 방식이다. 사건과 반응, 거기서 비롯하는 마찰과 따뜻함, 그 힘으로 걸어가는 것이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다시 앞을 보고 거친 땅을 걸어가자. 삶은 저항에서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