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얼로그의 힘

우리는 정말 대화하고 있는가?

by 남서진


도스도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을 다시 꺼내 읽으며 뜨겁게 응집되는 불편함이 있었다.


지옥은 '판관의 욕망이' 들끊는 곳이다.
'모두가 판관이 되려할 때' 지옥이 도래한다


회의실에서 사람들은 말한다.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반박하고, 동의하고, 침묵한다. 그 모든 과정이 끝난 뒤, 이렇게 자문해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지금 진짜 대화를 했는가?"


조직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대화'는 사실 대화가 아닐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은 각자의 입장을 교환하는 협상이거나, 이미 정해진 결론을 향해 달려가는 설득의 과정일 수 있다. 상대의 말을 듣는 척하며 빈번히 실은 나의 다음 발언을 준비했던 적 있지않은가. 조직개발의 수많은 현장에서도 자주 목격하게 되는 풍경이다.


다이얼로그(Dialogue)는 이 지점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1. 토론과 다이얼로그 : 어원이 말해주는 것

언어는 생각의 구조를 담는다. '토론(Discussion)'의 어원을 따라가면 '흔들어 부수다(discutere)'에 닿는다. 치고 부수고 쪼개는 행위. 논리로 상대를 분해하고 승패를 가리는 것이 토론의 본질이다.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토론이 유일한 대화 방식이 되는 순간, 조직은 서서히 병들게 된다. 구성원들은 '어떻게 이기는가'만 생각하기 시작하고, '어떻게 함께 발견하는가'라는 질문은 사라진다.


반면 다이얼로그는 그리스어 'dia(통해서)'와 'logos(의미/말)'의 결합으로 이뤄진 말이다. 의미가 사람들 사이를 통해 흐른다는 뜻이다. 승리가 목적이 아니라 새로운 이해에 도달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 차이는 단순한 어감의 차이가 아니라, 인간이 타인과 관계 맺는 방식 전체를 바꾸는 것이다.


2. 철학의 뿌리 : 소크라테스에서 데이비드 봄까지

다이얼로그는 갑자기 등장한 현대적 기법이 아니다. 그 뿌리는 깊고, 그 깊이를 이해할 때 비로소 다이얼로그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통해 상대방 스스로 자신의 모순을 깨닫게 했다.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은 '나는 모른다'는 겸손을 전제로 한다.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질문하지 않는다. 이미 답을 가진 사람은 상대의 말을 듣지 않는다. 다이얼로그의 첫 번째 조건이 여기 있다. 바로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용기’이다.


마틴 부버(Martin Buber)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인간의 관계를 두 가지로 나눴다. 상대를 '그것(It)'으로 대하는 관계와, '너(Thou)'로 대하는 관계. 우리가 타인을 분석하고 평가하고 활용하려 할 때, 그는 '그것'이 된다. 반면 그의 내면과 존재 자체에 진정으로 응답하려 할 때, 비로소 '나-너(I and Thou)'의 만남이 일어난다. 현대 OD에서 '존중'을 입에 올리는 모든 순간, 그 철학적 기반은 부버에게 닿는다.


그리고 데이비드 봄(David Bohm)이 있다. 이론물리학자이자 철학자였던 그가 다이얼로그 이론의 아버지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봄은 인류의 위기가 핵무기나 환경 파괴가 아니라, 인간의 '파편화된 사고(Fragmentation of Thought)'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각자가 자신의 사고가 '옳다'고 믿으며 서로 충돌할 때, 집단적 지성은 작동을 멈춘다. 봄의 이 내용은 이후 피터 센게(Peter Senge)로 전승되어 다이얼로그는 단순한 대화 기법이 아니라, 시스템 전체를 함께 볼 수 있는 집단 인식의 조건으로 자라나기도 한다.

봄이 제시한 해법이 바로 '가정의 보류(Suspending Assumptions)'이다.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눈앞에 들어올려, 마치 허공에 매달아놓듯 보류하는 것. 이것이 가능할 때, 비로소 집단의 사고는 흐르기 시작한다. 그는 촉진자 없이 이루어지는 집단 대화 실험을 통해, 구성원들이 스스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평생 연구했다.


이 세 사람의 통찰은 하나의 방향을 가리킨다. 즉 다이얼로그는 기법이 아니라 태도이자 존재 방식인 것이다.


3. 에드거 샤인이 본 다이얼로그 : 안전이 먼저다

에드거 샤인(Edgar Schein)은 이 철학적 통찰을 조직의 현실로 끌어내렸다. 그가 주목한 것은 '심리적 안전감(Psychological Safety : 심리적 안전감은 샤인·베니스가 처음 언급하고 에이미 에드먼슨이 실증적으로 정립한 개념'이다.


사람은 안전하지 않다고 느낄 때, 자신을 방어한다. 방어하는 사람은 자신의 가정을 보류하지 않는다. 보류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다이얼로그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 연결고리가 조직의 대화를 가로막는 가장 흔한 이유다. 샤인은 대화의 질이 관계의 깊이에 달려 있고, 관계의 깊이는 상대에 대한 겸손한 호기심과 탐색(Humble Inquiry)에서 출발한다고 보았다.


"나는 당신에게 진정으로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이 한 문장이 만들어내는 심리적 공간이, 모든 다이얼로그의 출발점이다. 우리가 워크숍에서 다이얼로그를 설계할 때, 기법보다 먼저 이 안전의 토대를 확인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4. 다이얼로그의 네 단계 : 표면에서 생성으로

다이얼로그는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단계를 거쳐 깊어지는 과정이다. 이 여정을 이해하는 것은 컨설턴트에게 특히 중요하다. 어느 단계에 있는지를 모르면, 엉뚱한 개입을 하게 된다.


첫 번째는 의례적 단계(Politeness)이다. 갈등을 피하고 예의를 차리는 단계로서 모두가 동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아무도 진심을 꺼내지 않는 상태이다. 안전하지만 생산적이지 않다. 안타깝게도 많은 기업의 회의가 이 단계에 머무는 경향이 있다.


두 번째는 자기주장과 논쟁의 단계(Breakdown/Debate)이다. 차이가 드러나고 긴장이 생긴다. 이 단계는 불편하지만 사실 진정한 다이얼로그를 향한 필수 통과 지점이다. 이 단계에서 갈등을 회피하는 조직은 첫 번째 단계로 영원히 후퇴하게 될 수도 있다. OD컨설턴트가 퍼실리테이터로서 제대로 역할해야하는 중요한 순간이기도 하다.


세 번째는 성찰적 다이얼로그(Inquiry/Reflection)이다. 상대를 설득하려는 시도가 줄고, 자신의 가정을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왜 나는 저 말이 불편한가?" "내가 옳다고 믿는 근거는 어디서 왔는가?" 이 질문들이 내면에서 작동하기 시작할 때, 대화의 질이 비로소 달라진다.


네 번째는 생성적 다이얼로그(Generative Dialogue)이다. 개인의 자아를 넘어 집단 전체가 하나의 사고 흐름 속에 있는 상태로서 누가 먼저 말했는지보다, 우리가 함께 어디로 가고 있는지가 더 중요해지는 단계다. 데이비드 봄이 꿈꿨던 '집단적 의미 창조'가 바로 이것이다. 드물게 일어나지만, 한 번 경험한 조직은 그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으려 하게된다.


5. 다이얼로그를 위한 워크숍 설계의 몇 가지 도구들


이 네 단계를 실제 워크숍에서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월드 카페(World Cafe), 긍정탐색(Appreciative Inquiry), 오픈 스페이스 테크놀로지(Open Space Technology), 서클 프로세스(Circle Process) 같은 다양한 기법들이 그 다리가 되어줄 수 있다. 각각은 고유한 구조와 맥락을 갖지만, 이 모든 기법이 공유하는 전제는 하나다. 사람들이 스스로 의미를 발견하도록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그 ‘공간’은 곧 경청을 위한 공간이기도 하다. 기법은 수단이다. 그 수단이 얼마나 잘 작동하느냐는, 그 공간을 지키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6. OD컨설턴트의 역할 :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공간을 지키는 자

여기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 등장한다. 다이얼로그 워크숍에서 컨설턴트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많은 컨설턴트가 이 질문에서 실수를 저지른다. 지식을 전달하고, 프로세스를 관리하고, 결론을 도출하는 사람이 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이얼로그의 세계에서 그런 역할은 오히려 공간을 닫게 된다. 그래서 이 때 퍼실리테이터가 되는 것이 필요하다.


진정한 퍼실리테이터의 역할은 '홀딩 스페이스(Holding Space)', 즉 공간을 지키는 것이다.

이것은 세 가지를 요구한다.


첫째, 안전한 장을 마련하는 것. 비난받지 않고 말할 수 있다는 신뢰를 바닥에 까는 일이다. 그라운드 룰(Ground Rules)은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심리적 안전의 물리적 표현이다.


둘째, 가정의 보류(미루기)를 촉진하는 것.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라는 질문은 상대를 방어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 생각 이면에는 어떤 가정이 있을까요?"처럼 스스로를 들여다 볼 여지를 줄 수 있으면 더 좋다. 질문 하나의 차이가 대화의 방향 전체를 바꿀지도 모르니 중요한 지점이다.


셋째, 침묵을 포용하는 것. 많은 퍼실리테이터가 침묵을 두려워하며 서둘러 채우려 한다. 그러나 다이얼로그에서 침묵은 성찰이 일어나는 순간이자 공간이 만들어지는 장이다. 그 침묵을 견디고, 관리하고, 함께 머물 수 있을 때 — 비로소 컨설턴트는 공간을 지키는 사람이 된다.


말이 아닌 의미를 흘려보내는 것

결국 다이얼로그는 '더 잘 말하는 기술'이거나 '더 잘 듣는 기술'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옳다는 확신을 잠시 내려놓고, 상대의 내면에 진심으로 호기심을 갖는 태도다. 그리고 그 태도가 퍼져나가는 공간을 조심스럽게 설계하고 지키는 일이다.


조직 안에서 진정한 다이얼로그가 일어날 때, 사람들이 달라질 수 있다. 회의가 달라지고, 팀이 달라지고, 문화가 달라질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광장에서, 부버가 철학 서재에서, 봄이 물리학 실험실에서 각기 다른 언어로 말했던 것이 결국 같은 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의미는 혼자 만들어지지 않는다. 사람들 사이를 흐를 때 비로소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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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l William Isaacs, 《Dialogue and the Art of Thinking Together》

l David Bohm, 《On Dialogue》

l Edgar Schein, 《Humble Inqui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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