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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준 Mar 31. 2016

죽음, 허무 그리고 바라나시

더러운 물 속에서 뭐하세요?

"더러운 물 속에서 뭐하세요?"  그들이 물에서 신나게 노는 모습을 봤을 때 이렇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너무나도 경건한 모습으로 목욕을 하고 기도하는 이가 있었기에.



공기, 불, 하늘(땅), 물, 빛이 우리의 몸을 만들었다. 갠지스강은 신의 물, 마더 강가라고도 불린다. 그렇기 때문에 저 멀리 인도 남부에서도 이곳으로 와서 신을 찬양하고 목욕을 한다. 카르마(업)는 누구나에게 있는데 악업과 선업으로 나뉜다. 인도 사람들은 악업을 갠지스강에서 씻어낸다. 갠지스강은 시바라는 강력한 신의 강이기 때문에 갠지스강에서 목욕을 하면 업이 씻겨나간다. 힌두교 신자들은 갠지스강에서 목욕을 하고 집에 가서 샤워를 하고 신전에 가서 원하는 것을 빌고 일을 하러 간다.


우리 나룻배의 노를 젓는 친구는 힌두교 신자이다. 그는 자신이 힌두 문화에서 자랐고, 자신이 예배를 할 때마다 신들의 존재를 느끼기 때문에 힌두교를 믿는다고 했다. 이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사랑이란 것을 느끼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또 신은 언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모른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인에게 잘해주어야 하고, 동물이나 식물에게도 잘해주어야 한다고 했다.


갠지스강에는 두개의 화장터가 있는데 한 곳은 가난한 사람들이 쓰는 곳이고 나머지 한 곳은 부유한 사람들이 쓰는 곳이라고 한다. 화장터를 인도에선 가트라고 부른다.(사진은 찍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들은 500루피(한화 약 8500원) 정도의 돈을 지불하고 기계로 화장을 시키는 반면에 부유한 사람들은 2000루피-6000루피(한화 3만 5천 원-10만 5천 원)를 내고 관을 나무로 짠 후에 갠지스 강가에서 태운다.


사람들은 "람람 사뜨헤, 람람 사뜨헤"를 외친다. 람람은 몸, 사뜨헤는 진실이라는 뜻으로 람람 사뜨헤는 진실된 몸이라는 뜻이다. 4개의 대나무를 엮은 후에 시신을 그 위에 얹고 남자는 오렌지색, 여자는  붉은색의 천으로 덮는다. 오렌지색의 시신이 저 멀리 계단에서 엮인 대나무 들것에 들려서 가까이 온다. 가족들은 시신을 마지막으로 갠지스강에 담근다. 가족이 죽으면 상주는 머리를 깎는다. 머리를 깎은 사람이 불을 붙이는데, 이 불은 보통 불로 붙이지 않는다. 시바 신전에 1000년의 세월을 유지하며 붙어있는 불을 들고 시신을 향해 다가온다. 시신을 바라보는 상주의 얼굴을 보니 넋이 나가 있다. 시신이 완전한 재로  되기까지 평균 3시간 20분이 걸리는데, 사람들은 24시간을 태운다고 한다. 불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고등학교 때 돌아가신 친할아버지가 생각났다. 사람들의 표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들로 가득 차 있거나 퀭하게 비워져 있다. 장례식장에서만 볼 수 있는 표정들이 그들의 얼굴에 보였다. 


시체를 가운데 놓고 사람들은 서로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고 있다. 주변의 불이 5개 정도 있는데 모두 흰색 연기를 내며 타고 있다. 사람들은 불꽃을 바라보며 계단에 앉아있다. 갠지스강의 물 냄새가 단백질이 타는 냄새와 오묘히 섞인다. 나는 고기 냄새가 날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내가 생각한 그 냄새와는 많이 다르다. 가까이 가서 보니 노란색으로 감싼 천이 불타면서 사람의 얼굴이 드러난다.  검은색으로 그을린 얼굴은 아직은 사람의 형체를 보인다. 뼈와 가죽 앙상하게 달라붙어 보는 이로 하여금 겸허하게 만든다. 나무 특유의 매운 냄새가 시체 냄새를 덮는다.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 배 위에서 나는 지켜보고 있다. 시체를 활활 태우고 있다. 어떤 사람은 한 없이 불을 바라보고만 있다. 자식이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는 표정이 무언가 넋이 나간 모습이다.


한편 갠지스강의 다른 장소에서는 사람들의 평화를 위한 의식을 하고 있다. 또 다른 곳에서는 힌두교의 브라만 사제들이 마이크를 켜놓고 시끄럽게 무언가를 설교하고 있다. 사람들은 춤을 추고 악기를 연주한다. 음악이 갠지스강가에 퍼진다. 이 모든 것이 가트(화장터)에서 굉장히 가까운 거리에서 이뤄지지만 장례식과는  상관없는 일들이다.

갠지스강에서 사람의 죽음은 아주 자연스럽다. 아주 가까운 곳에 죽음이 있고, 그들은 죽음과 더불어서 산다. 그들의 모습이 아주 자연스럽다. 그들은 매일 죽음을 보고 죽음과 함께 산다. 죽음은 그들에게 낯선 불청객이 아니다. 인생의 수레바퀴 안에 있는 하나의 순서일 뿐이다.


우리도 죽음에 있어서 그들과 다를 것이 하나 없다. 그러나 내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영원히 살 것 같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70살 정도까지는 무리 없이 살다가 죽을 것 같다. 아마 아직 살아계시고 앞으로도 오래 사실 우리 할머니를 보고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다. 죽음은 1% 이상의 가능성으로 우리 곁에 항상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우리는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점점 죽어간다고 할 수도 있겠다.


바라나시를 보고 있노라면 허무 해져서일까, 아니면 갠지스강의 수행자들처럼 나도 왠지 수행자가 된 느낌이라서 일까 전도서가 생각난다.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알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이다. 


대저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가 재앙의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림 같이 인생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하면 거기 걸리느니라 - 전도서 9:12(개역한글판)


전도서는 구약성서에 있는 지혜문학이다. 본래  קהלת(코헬렛)이라고 불리는 이 단어는 קהל (카할)이라고 불리는 '청중'에서 번역된 것이다. 구약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교회적인 해석이 들어갔고 코헬렛(지혜자)은 교회에서 하는 전도 목적의 책과 같은 느낌이 물씬 난다. 하지만 막상 읽어보면 전도의 목적보다는 지혜에 관한 얘기임을 알 수 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 1:2



바라나시의 사람들이 죽음에서 출발한다면 코헬렛은 허무로부터 출발한다. 이 땅에서의 수고도 헛되고, 즐거움도 헛되고, 돈과, 명예도 헛되다. 허무함은 원어인 히브리어에서는 הבל(헤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호흡, 한숨, 공기와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코로 들어와 나가는 공기와 같은 것, 항상 곁에 있는 것 같지만 잡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것, 그렇게 공기처럼 허무한 것이 인생이다. 코헬렛은 허무로 출발하여 허무로 끝난다.


죽음과 허무, 이 모든 것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최대의 고통이자 순리이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피하고자 노력하지만 결국에는 찾아오는 것이 죽음이다. 인생을 열심히 사면 살 수록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이 허무이다. 죽음은 또 다른 생명을 낳기에 생명을 알기 위해서는 죽음을 알아야 한다. 또 허무는 또 다른 희망을 낳기에 희망을 알기 위해서는 허무를 알아야 한다.


죽음, 우리는 언젠가 육체적인 죽음도 맞이하지만 때론 또 다른 차원의 죽음을 경험한다. 죽음은 개인의 세계의 종말이다. 나의 세계를  끊임없이 종말 시킬 때 생명이 생겨난다. 나의 편견, 탐욕, 폭력, 교만을 죽이면,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사도 바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날마다  죽노라.'와 같은 것이다. 나를 죽이고 신의 은총으로 살면 그곳에는 생명이 있다.


허무, 허무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블랙홀이다. 수 많은 지식들, 신뢰, 관계, 인생의 전부를 허무로 결론 맺을 수 있다. 인류는 그렇게도 많은 지식과 문명들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얼마나 인간이 나약하고 그동안 쌓은 지식들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체험하였다. 또한 실제로 우리는 삶 속에서 허무를 경험하면서 산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교 나와서 좋은 직장에 취직해서 열심히 다니다가 은퇴해서 치킨집을 차리는 현실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허무함은 낯설지 않다. 그러나 허무는 좋은 땅에 꼭 필요한 거름과 같아서 허무 이후에 오는 신념은 강하고 견고하다. 허무함은 절망을 불러오고 절망은 희망의 씨앗이 된다.


저 멀리 팔레스타인 땅에서도, 여기 인도의 강가에서도 현자들은 인간의 근본적인 것에서 출발했다. 나의 출발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생각이 깊어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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