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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준 Mar 31. 2016

형은 먹고 살 걱정 안돼요?

저는 학교 졸업하고 당장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어요.

지금은 밤 12시 10분, 새벽 버스를 타러 고속버스터미널로 가고 있는데 SOL 광장에서 장사를 하던 흑형들이 이제야 퇴근을 한다. 큰 봉투에 든 가방과 악세사리들을 보물같이 움켜쥐고 혹여나 경찰들이 있진 않을까 좌우를  두리번거린다. 피곤하고 지쳐 보이는 그들의 어깨가 보인다.

오늘은 창식이 형과 헤어지는 날. 건우를 세고비아 가는 버스 터미널에 데려다 주기 위해 창식이 형보다 일찍 나왔다. 창식이 형과 작별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마음이 짠했다. 그때까지는 창식이 형과 헤어지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라나다로 가는 버스를 예약하고 SOL 광장에서 유명하다던 츄러스도 먹고 한국에서 입고 온 반바지가 낡아서 찢어져서 바지도 하나를 샀다.

 숙소로 돌아와서 초인종을 누르는데 뭔가 허전하다. 뭔가 하고 봤더니 창식이 형의 오토바이가 없다. 허전하다. 돌아왔는데 늘 있던 창식이 형이 없다. 웃으면서 "왔어? 오늘은  뭐했어?"라고 물어보던 창식이 형이 없다. 순진하게 생겨가지고 온갖 익스트림 스포츠를 다 즐기고 말도 안 되는 열정으로 목숨 바쳐 여기까지 온 창식이 형이 없다. 허전하다. 만난 지  3일밖에 안됐는데 왜 이렇게  마음속에 헤어진 공간이 클까. 

이별은 감기 같아서 처방약이 없다. 그냥 푹 쉬고 시간이 지나야 한다. 걸린 적이 있어도 또 걸린다. 아니 감기보다 지독하다. 예방도 되지 않는다. 이 숙소에 괜히 왔다. 떠날 때가 다가오니까 훈련단 동기 떠나보내는 마음처럼 아쉬움에 울컥한다. 괜히 왔다. 다신 이런 숙소에 오지 말아야겠다.

건우와 주현이를 한국에서 보기로 했다. 창식이 형도 여행이 끝나는 대로 한국에서 만나기로 했다. 여행의 감흥이 떨어지고 삶의 무게에 짓눌려 추억과 감동을 잊어버릴 즈음에 다시 만나야겠다. 용인 이형은 한국에 오질 않으니 언제 볼지 모르겠다.  내일모레 떠나는데 어떻게 떠나야 할지도 모르겠다. 가장 좋을 때 떠나는 게 맞다는 형의 말대로 그냥 떠나야겠다. 한국에 돌아가 언젠가 나도 형이 있는 곳에 다시 여행을 가야겠다. 다시 여행 갈 충분한 이유가 생겼다.

그라나다에 있는 알함브라 궁전을 보고 숙소에 있는 사람들이 보고 싶어서 숙소로 일찍 돌아왔다.

 숙소에는 용인이형이 있었다. 처음에는 창식이 형이 가고 나중에는 아람 누나가 갔다. 이어서 건우와 주현이가 떠났다. 파리 가는 비행기를 예약해야 되는데 이곳에 조금 더 있고 싶었다. 그렇지만 더 있으면 뭔가 늘어질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 떠나는 비행기를 예매하되 아침 비행기가 아닌 오후 비행기를 선택했다.

 용인이형하고 더 있고 싶었다. 이곳을 떠나기 싫었다. 용인이형하고 더 많은 얘기를 해보고 싶었다. 이곳에 있고 싶었다. 저녁을 먹고 있는데 새로운 사람들이 숙소에 들어왔다. 이상하게도 반갑지 않았다. 전에 있던 사람들이 그리웠다. 새벽 1시 30분, 시끌벅적했던 술자리를 접고 모두 잠자리에 들었다.

숙소에는 방이 없었다. 가득찬 숙소에는 형이 차마 쫓아내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한 사람은 소파에서, 한 사람은 식탁 밑에서 그리고 나는 형 방 침대 바닥에서 이불을 폈다. 용인이형은 자기 방 침대에서 자라고 했다. 형이 바닥에서 잘 테니까 침대에서 자라고 말했다. 나는 그냥 바닥에 이불을 폈다. 침대에서 자면 형에게 미안해서 잠이 안 올 것 같았기 때문에.

불이 꺼지고 적막이 흘렀다. 나는 여행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듯이 형에게 물어봤다. "형 앞으로 먹고 살 걱정 안돼요?" 형이 대답했다. "응"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사람들은 어떻게 살지를 걱정하는데 나는 어떻게 죽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그리고 나는 지금  후원받으면 받을 수 있어. 다만 내 힘으로 해보고 싶어서 내가 안 받는  것뿐이야." 형의 당당함이 느껴졌다. 생각해보니 형은 유명인이었다. 본인은 그렇지 않다고 겸손하게 말하지만 많은 사람이 알면 유명인이 아닌가? 유명인 맞다. 질문이 조금 잘못된 것 같았다. 먹고 살 걱정은 내가 하고 있는 걱정이었지, 형이 하고 있는 걱정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냥 돌려 말하지 않고 내 상황을 형에게 말했다.

"저는 학교 졸업하고 당장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어요. 아니 당장 한국에서 가서 학교를 다녀도 즐거울지도 모르겠어요. 여행이 끝나고 나서의 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근데 여행하다가 문득 생각이 든 것은 돈이 있어야 선택의 폭이 넓어질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근데 돈을 벌 때 어렵게 벌어도 재밌게 벌어보고 싶어요. 제가 뭔가를 만들어서 재밌는 일들을 해보고 싶어요. 한국에 돌아가면 자격증 공부를 해서 가이드를 해보고 싶어요. 한 사람당 3만 원씩 잡고 일주일에 3번, 5명씩 하면 벌써 한 달이면 240만 원이니깐요. 재밌을 것 같아요." 그러자 형이 대답했다.

"아냐 틀렸어. 돈을 벌려고 가이드를 하면  안 돼. 가이드를 하다 보면 돈이 벌리는 거야. 돈을 벌려고 가이드를 하면 벌써  가이드하는 사람에게 그 마음이 나타나게 되어있어. 뭔가 보상을 바라는 사람의 태도는 금방 티가 나거든. 그냥 네 진심을 담아서 열심히 해봐. 그러면 네 진심을 알아주는 사람들이 나타나. 그때까지 기다리는 게 정말 힘들지만, 그게 내가 살아온 길이야." 그러면서 형은 호주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한국에서 79만 원 들고서  세계여행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다  손가락질했어. 비웃고 안된다고 했어. 그래도 형은 떠났어. 호주에 가서 워킹홀리데이를 하는 동안 농장일을 했는데 시스템이 좀 이상했어. 시급으로 줘서 일을 열심히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시스템이었어. 그래서 사람들은 대충대충 시간을 채우고 갔지. 근데 어떤 형이 한 명 있었어. 그 형은 그냥 열심히 했어. 그래서 나도 그 형 하고 같이 열심히 했어. 두 명이서 열심히 하니까 능률도 오르고 일이 재미있어지더라. 그때도 사람들이 우릴 보고 비웃었어. 똑같이 돈 받는데 왜 그렇게 바보 같이 행동하냐고 손가락질했어.

그런데 어느 날 농장주인이 그 형 하고 나를 부르더니 일을 잘한다고 칭찬을 하는 거야. 그리고 다른 일을 하고 싶은 게 없냐고 물었지. 나하고 같이 열심히 하던 형은 다른 과일을 따고 싶다고 요구했고 나는 도시에서 일을 하고 싶으니 추천서를 써달라고 했어. 그래서 호텔 카지노에 가서 설거지를 하게 됐지. 그곳에 한국인은 나밖에 없었어. 그만큼 영어를 잘해야 올 수 있는 곳이었나 봐. 그런데 나는 그 농장 주인의 추천서가 있어서 올 수 있었어. 카지노에서  설거지하니까 돈이 금방 벌리더라.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돈은 내가 성실하게 하면 언젠가 따라오기 마련이야."

형 말을 듣는데 포항 훈련단에서 목사님이 설교했던 요셉 이야기가 생각났다. 요셉이 형들의 질투로 인해 노예상인에게 팔려갔을 때에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실히 살았더니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복을 주시고 이집트의 총리로 세우셨다는 이야기. 이 이야기를 듣고 항상  마음속에 새기며 군생활을 했더니 남들은 한두 개 받기도 힘든 포상을 8개나 받았던 기억이 났다. 그리고 고개가 끄덕여졌다. 아직 한국에 가서 무엇을 할지 구상 중에 있지만 확실한 것은 그 일을 행할 때 미련할 만큼 성실해야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여행을 떠날 때 사람들이 그렇게 여행 다녀서 뭐하냐고 비웃음 섞인 질문을 했던 것처럼, 또 사람들은 내게 그런 식으로 손가락질을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대부분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평소에 내게 관심도  없었을뿐더러 자신이 말한 그 한마디가 내겐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 모르는 채 그렇게 한마디 뱉어놓고 집에 가서 발 씻고 편히 자는 사람이다. 그러니 나도 그 사람을 그렇게 대하는 것이 맞다.

형이 자기 전에 내게 말해주었다. 사람들은 정말 불가능한 일에는 불가능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아. 불가능이라는 단어는 매우 어렵다는 것을 뜻해. 매우 어렵다는 것은 할 수 있다는 거야. 그래서 나는 이 세상에 불가능한 게 없다고 생각한다. 하면 다 되는 거야. 그렇게 말하고 형은 쿨하게 잠이 들었다. 형 말을 듣고 가슴이 뛰었다. 이 형이 왜 유명한지 알 것 같았다. 아주 단순한 세상의 진리들을 몸소 도전하며 살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의 힘은 실로 대단했다. 말을 잘해서가 아니었다. 웃겨서도 아니었다. 형이 그렇게 살고 그걸 얘기하니까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졌다. 그리고 형이 존경스러웠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형은 벌써 일어나  집안일을 하고 있었다. 마드리드 근교로 가는 사람들에게 길을 알려주고 챙겨주었다. 나는 전날 그라나다로 갔다 오느라 너무 피곤해서 다시 잠이 들었다. 자고 일어나니 형이 볶음밥을 하고 있었다. 형이 해주는 볶음밥을 먹고 숙소에 어제 도착한 해병대 선임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형은 피곤했는지 소파에 누워서 낮잠을 잤다. 낮잠을 조금 잔 후에는 다시 청소를 했다. 변기도 닦고 방도 청소하고 복도도 쓸었다. 시간이 지나 마드리드 근교에 갔던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조용했던 숙소는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그리고 떠나갈 시간이 점점 다가왔다. 형은 내게  저녁때 되면 배가 고플 거라며 라면 하나 먹고 가라고 했다. 처음 이 숙소에 왔을 때 먹었던 음식이 라면이었다. 그때도 아침을 못 먹고 온 상태였기에 형이 라면을 끓여주었다. 처음 먹은 라면은 그렇게 맛있고 반가웠는데 나갈 때 먹는 라면은 왜 이렇게 먹기가 싫었을까. 계란이 2개 씩이나 들어갔음에도 먹기가 싫었다. 이 라면을 다 먹으면 헤어져야 하기 때문에.

헤어지는 방법을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누가 가르쳐준다 해서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용인이형한테 고맙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헤어졌다. 거지 같은 몰골로 찾아온 나를 왜 이렇게 잘해줬냐고, 왜 형은 그렇게 불편하게 자면서 그렇게 남들 챙겨주지 못해서 아쉬워했냐고, 그렇게 장사해서 뭐가 남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했다. 하고 싶은 말 다하면 창식이 형처럼 울어버릴 것 같아서 그냥 '갈게요' 하고 공항으로 향했다.

여행 다니면서 이렇게 아쉬운 적이 없었다. 꿈에 그리던 에펠탑을 뒤로 할 때도, 목숨 걸고 노숙했던 카파도키아의 동굴을 뒤로 할 때도 이렇게 아쉽진 않았다. 마드리드는 다른 것 때문이 아니라 용인이형 숙소에서 있었던 일들 때문에 잊지 못할 것 같다. 언젠가 건우가 깜빡하고 챙겨간 마드리드 숙소 열쇠를 가지고 한국에서 다시 모일 때가 벌써부터 기대된다. 마드리드,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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