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잘 부탁드립니다.
‘육지 사람이 제주도 투어를 한다고요?’
육지라는 단어를 살면서 얼마나 쓸까? 지리 시간에 쓴 이후로 꽤 생소했던 단어인데, 제주에 와서는 이토록 평범하고 자주 사용하는 단어가 되었다. 그렇다. 나는 육지 사람이다. 유럽에서 투어를 진행할 때 느꼈던 외국인으로서의 소외감이 있었는데 내 나라 대한민국에서도 똑같진 않지만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제주 사투리를 연습해보려고 하지만 그게 더 어설퍼보이는 것은 당연지사. 그래도 큰 걱정은 없다. 한국사람이 프랑스에서도 투어 하고, 스페인에서도 투어를 했었는데 제주도라고 못할까. 할 수 있다.
여행자의 시선으로 만드는 제주도 투어
투어를 만들기 전, 시장 조사를 했다. 몇몇의 업체들이 이미 있었는데, 대부분이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제주도에서 태어나고, 어릴 적부터 자라면서 경험했던 제주도를 소개해준다는데 이걸 어떻게 내가 이길 수 있을까? 벌써부터 기가 죽는다. 그렇게 제주도민이 아니기에 느껴지는 열등감(?) 같은 것들이 내 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 보니 투어를 만드는 재미도, 속도도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이 사람들을 이겨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투어를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애초에 제주도민들의 시선으로 보는 투어가 아닌, 여행자의 시선으로 보는 제주도 투어를 만들어보는 것이다.
여행지로서의 제주도
해외여행이 흔치 않았던 1970-80년대에는 국내로 신혼여행을 가는 부부들이 많았다. 그중 비행기를 타고 갈 수 있는 제주도는 명실상부 최고의 신혼여행지였다. 부모님께 여쭤보니 부모님도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왔다고 했다. 이후 1989년 해외여행을 갈 수 있게 되면서 제주도 여행의 열기는 한 풀 꺾기게 되었다. 그리고 수많은 제주도 여행이 단체관광의 형태로 유지되었다. 2000년대 초반부터는 다양한 테마 박물관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기도 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테마 박물관들이 100개가 넘게 난립했고, 관광객들은 제주도까지 와서 테마 박물관의 홍수 속에 허우적거리다가 돌아가기도 했다. 이후 2007년 '힐링'이라는 콘셉트가 대두되고 올레길이 본격적으로 개발되면서 제주도 여행의 열기가 다시금 찾아오게 됐다. 그리고 최근엔 SNS에 인증할 수 있는 예쁜 카페와 사진 맛집들을 찾아다니는 이른바 '보여주기식 여행'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여행자의 눈에 비친 제주도
예쁜 사진을 찍고, 분위기 좋은 카페를 가고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실제로 예쁜 사진을 찍어주기 위해 수백만 원짜리 카메라를 사서 이곳저곳 숨겨진 장소들을 찾아다니고, sns에서만 유명한 식당, 카페가 아니라 진짜 맛집을 찾아다니기 위해 수천 킬로를 돌아다니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여행의 전부라고 하기엔 무언가 아쉽다. 지중해의 아름다운 섬들을 보면 저마다 대단한 이야기보따리들을 품고 있다. 그냥 보면 예쁜 풍경 정도이지만, 일리아드와 오디세이, 그리스 로마 신화들을 듣고 나서 여행을 다니게 되면 수천 년 동안 잠들어 있던 신들의 세계에 초대받은 느낌이 든다. 신화가 고대인들의 상상력을 담은 그릇이라면 역사는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실재이다. 실제로 여행하는 곳의 역사를 알고 볼 때와 모르고 볼 때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다. 그렇기 때문에 널리 알려진 여행지들에 가보면 기본적으로 역사 투어들이 있다.
제주도는 1만 8천여 명이 넘는 신이 존재하고, 탐라국 시절부터 무구한 역사들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신화와 역사가 이렇게나 풍성한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부분들이 각광받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여행자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굉장히 아쉬운 부분이었다. 제주도는 아직 여행지로서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는 곳이다.
너와 나의 연결고리
어떠한 것을 설명할 때 다른 것과 비교해서 설명하는 것은 더욱더 큰 흥미를 이끌어낸다. 실제로 해외에서 투어를 할 때는 한국과의 연결고리를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1900년에 파리에서 열렸던 만국박람회가 그냥 저 머나먼 나라에서 열린 행사가 아니라, 대한제국이 참여해서 건축분야에서 수상을 했던 아주 의미 있었던 행사였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꽤나 흥미롭게 다가올 수 있다. 또 바르셀로나의 고딕지구를 가이드할 때도 독재자 프랑코가 까탈루니아 민족을 탄압하고 학살했던 광장에서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와 비교해서 설명을 했다. 비슷한 시기, 비슷한 사건을 겪은 우리의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느새 100년 전 바르셀로나의 유적지가 더 생동감 있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는 서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궁궐과 사찰에 있는 단청이 독립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실크로드를 통한 문명교류에 영향을 주고 받았다는 것, 창덕궁의 후원을 설명할 때 프랑스의 베르사유 정원과 비교해서 설명을 했던 것들이 그러한 것들이다. 제주도를 설명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이야기의 연결고리들을 만들어서 함께 설명하다 보면 훨씬 더 풍성하고 재밌는 설명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제주도를 알린 사람들
제주도를 공부하며 제주도에서 유명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최근에는 이효리, 루시드폴, 임창정 등의 아티스트들이 각광받는다면 약 100년 전에는 이중섭 화백이, 조선시대에는 추사 김정희와 같은 사람들이 제주도를 떠올릴 때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이름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외지인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나는 주눅 들지 않을 것이다. 외부에서 왔다고 제주도를 알릴 수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누군가가 육지 사람이 제주도 투어를 한다고요?"라고 의심 섞인 눈초리로 물어본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