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케아 공의회 여행기
난 교회를 다니고 신학을 공부한다. 그런데 삼위일체가 안 믿어진다. 그래서 삼위일체를 놓고 회의를 했던 니케아(이즈니크)에 여행을 왔다. 이곳에는 정답이 있을까 하는 마음에 들어온 건물은 생각보다 초라하고 아담했다. 입구에서부터 성큼성큼 발을 옮긴 나는 실망에 빠졌다. 과연 이 공간이 그 유명하다던 아타나시우스와 아리우스의 논쟁이 벌어진 곳이 맞는가? 황제가 앉기에 너무나도 부족해 보이는 이 곳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작고 아담하다.
유리막으로 보호되어있는 두개의 공간이 있다. 하나는 심문석과 같아 보이고 또 하나는 반원형 모양의 회중석과 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 어느 공간도 어른들이 앉아있을 만큼 큰 공간은 없다. 이 정도 규모라면 성인 100명 안팎의 인원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앞에 있는 무대에는 황제와 아타나시우스, 아리우스 이 셋이 서있는 그림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입구에서 바라보았을 때 정면으로 보이는 큰 돔과 그 양쪽으로 나 있는 공간이 보이는데, 이 공간에는 성화가 그려져 있다. 굉장히 많이 훼손되어서 그 흔적을 찾기 힘들 정도이지만 분명히 저것은 성화이다. 건축양식의 모양도 로마에서 보았던 벽돌로 만든 아치형이 틀림없다. 곳곳에 로마의 흔적이 보인다. 지금 이곳은 이슬람 회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슬람은 그림을 우상이라고 생각하여 못 그리게 하는데 예외로 꽃 그림이 많이 그려지고 있다. 꽃은 천국을 상징한다. 이러한 꽃무늬 모양이 건물 여기저기에 그려져 있음을 찾을 수 있다.
건물 입구와 왼쪽 뜰 밖에는 이스탄불에 있는 아야 소피아 성당의 바닥에 있는 것과 비슷하게 생긴 문양이 새겨져 있다.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니케아 공의회가 기독교 최초의 공의회라는 상징성이 굉장히 커서였을까 이 공간이 매우 작게 느껴진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처음이었기에 이렇게 작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의 첫 단추는 내가 생각했던 것 만큼 크고 위대한 작업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연설을 토해내듯 사람들을 설득하고 황제에게 자신의 믿음을 선포하는 엄청나게 규모가 큰 자리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300년 전, 팔레스타인 청년 예수라는 사람이 신이냐 인간이냐를 놓고 공적인 장소에서 토론을 하는 것은 황제도 생소했고, 교부들도 생소했다. 서로가 처음이었기에 작은 것부터 시작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치 작은 불이 번져 큰 산을 태운 것처럼 그들은 작은 논쟁에서 시작했을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이것이 큰 논쟁으로 번지고 갈라지는 계기가 되진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건물 안 돌계단에 앉아 글을 쓰고 있자니 사람들이 한두 명씩 드나든다. 여러 명이 한꺼번에 오지 않고 가족 단위로 2명에서 5명 정도가 드나든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기도하러 오는 사람이 한 명씩 생긴다. 아랍어로 쓰인 간판에 절을 하고 기도를 한 뒤 조용히 나간다.
무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법정이 떠오른다. 판결하는 사람과 죄인이 마주 보고 있는 형상이 떠오른다. 동시에 사람이 사람을 불러다 놓고 사람의 얘기를 판결하는 것을 기초로 교회의 불변의 질서가 세워졌다는 사실 자체가 굉장히 모순이라는 생각이 든다. 삼위일체가 더더욱 믿어지지 않는다. 아니 이쯤 오면 믿어질 줄 알았는데 심히 당황스럽다.
솔직히 사진 몇 장 올려놓고 그럴싸한 글로 이제는 내가 삼위일체를 믿게 되었노라고, 실제로 현장에 와보니 성령의 능력이 강력하게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도 성령의 능력으로 아타나시우스가 이기게 되었고 삼위일체의 기본이 성립이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안 믿어지는 걸 어떡하나. 거짓말은 나쁜 것이다.
더 나아가 니케아 신조를 외우던 약 100명의 사람들이 조직적이고 정치적으로 이곳에 모여서 황제와 함께 교회의 초석을 논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 또한 든다. 생각해보니 이곳은 그럴만하기도 한 곳이다. 각자가 믿는 것을 주장하고 황제가 판결을 내리는 곳이니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삼위일체에 대한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공의회의 현장이 아닌 그들이 어떻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는지에 대한 삶의 현장을 가보아야 할 것이다.
내가 믿는 삼위일체는 절름발이 삼위일체다. 광야에서 떠돌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해낸 야훼 하나님,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자들을 고치시고 죄인을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릴 위해 기도하고 계시는 성령님. 이 3개가 따로는 믿어지는데 서로 중첩되는 그 어느 부분에선가 자꾸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생각하게 된다. "에이 정말로?"
삼위일체는 성경에 직접적으로 나와있지 않을뿐더러, 후에 사람들이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만든 교리라는 인상이 강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삼위일체는 어느 순간 뿅 하고 나타난 것이 아니다. 정치적인 목적만으로 만들어졌다 하기엔 너무나도 많은 희생과 목숨을 건 사투들이 있었다. 실제로 니케아 공의회에 참여했던 양쪽 진영 모두 예수를 믿다가 팔과 다리가 잘리고 눈을 뽑히는 등의 형벌을 받아서 불구가 된 사람들이 80퍼센트가 넘었다고 한다. 그들의 신앙은 그만큼 순수했다. 그렇다면 분명히 삼위일체를 위해 목숨을 바쳐 살았던 그 사람들의 삶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게 궁금하다.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에 대해 전혀 모르는 이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르면 설명하지도 못하고 어설프게 알면 횡설수설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삼위일체를 어설프게 안다. 설명의 한계가 오면 '신비'라는 이름으로 포장한다. 그게 적당히 편하다. 삼위일체라는 형이상학적인 개념이 당시에 널리 유행했던 것이라서 문화적인 배경을 이해하지 못해서 삼위일체가 이해가 안 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삼위일체라는 교리가 이해를 위한 교리가 아니라 사고하는 과정 가운데 믿음이 성숙하고 건강한 사색을 하는 게 목적이라면 삼위일체는 굉장히 성공적이다.
어거스틴은 삼위일체를 사랑이란 키워드로 풀어냈다. 하나님이 우릴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보내셨고 성령님이 사랑으로 함께하신 다는 것이다. 이를 수업시간에 들은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이쯤 되면 나는 머리가 나쁘거나 앞뒤가 꽉 막힌 사람이 분명하다. 근데 나는 어거스틴이 한 말을 들었을 때 말장난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해결되지 않으니까 아름답게 포장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끄덕이게 만드는 그런 어투 말이다. 그 말에 나는 모욕감마저 느꼈다. 어거스틴 나쁜 놈.
아! 도대체 왜 아타나시우스와 아리우스는 그렇게 이곳에서 치고받고 싸웠을까. 이제 해가 저물어간다. 얼마나 앉아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엉덩이가 저릿하고 다리에 피가 쏠린다. 결국 난 여기서 답을 얻지 못했다. 다만 하나 얻은 게 있다면 삼위일체를 살아내려고 했던 그 삶의 현장. 그곳에 왠지 해결의 열쇠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답답한 가슴 부여잡고 아야 소피아를 나온다. 부디 건물 이름처럼 내게 하나님의 지혜가 임하기를. 마지막으로 공의회에서 우리가 이렇게 믿기로 하자 라고 약속한 '사도신경'을 큰 소리로 외쳐보고 가려는데 기분이 이상하다. 굉장히 이상하다. 교회 다니면서 주기도문 다음으로 수천번을 외웠는데 너무 낯설고 가슴이 뛴다. 이 이상한 기분은 무엇일까.
다시 사도신경을 외워본다. 단어 하나하나씩 쉬엄쉬엄 또박또박 읊조려본다. 단어를 말하면 말할수록 수천번 수만 번 고민해서 적어놓은 듯한 담백한 느낌이 든다. 건물 안의 울림이 내 가슴을 울린다. 명치 쪽이 간지럽게 웅웅거린다. 이상하다.
이상한 기분과 해결되지 않은 아쉬움이 가득 찬 채 숙소로 돌아왔다. 속 시원하게 해결해버리고 싶었지만 삼위일체는 여전히 숙제로 남았다. 아마 이 숙제는 죽을 때까지 풀리지 않을 것 같다. 숙제는 풀리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답답한 기분은 풀렸다. 삼위일체는 머리로 이해되지 않지만 삼위일체를 믿는 사람들의 삶을 보면 삼위일체가 믿어지지 않을까 라는 희망을 갖고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