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와의 하루

by 서장석

요번 주 목요일 집사람이 제주도 간다며 손자를 하루 봐달라고 이야기한다.

그러겠다고 하며 얼마 줄 거냐고 협상한다. 오만 원 주겠다고 한다. 오케이. 난 평상시엔 새벽 2시나 3시까지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한다. 그래서 그 시간쯤 잠자리에 들어 10시쯤 기상한다. 그런데 오늘은 7시 30분에 일어나 샤워하고 아침을 먹는다. 때마침 전화가 울리고, 집사람이 궁금하여 전화한 것이었다. 왜? 하고 묻는다. 일어났어. 아직도 자는 줄 알았지. 찌개는 여름철 쉬기 때문에 반드시 아침, 저녁으로 팔팔 끓여 놓으란다. 열무김치는 냉장고에 새로 담가 놓은 게 있으니 꺼내 먹되 뒤적거리지 말고 꺼내 먹으라 한다. 여자들은 밖에 나가기만 하면 걱정이 많다. 그러려면 무엇하러 가느냐고 타박하고,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붙들어 매 놓으라고 퉁명스럽게 답한다. 어차피 서로 다들 알아서 할 텐데 구태여 확인하고 또 그걸 귀찮아하고 구시렁대면서도 하는 걸 보면 서로가 세월을 살아온 부부가 맞나 싶다.

아침 먹고 설거지를 마쳤다. 잠시의 휴식 시간 커피포트에 물을 올려놓고 카키색 컵에 커피 알갱이를 털어 넣는다. 잠시 후 커피포트가 소리를 낸다. 물 다 끓었다고. 전기 스위치를 끄고- 여기서 끈다는 소린 완전히 차단한다는 의미임- 우리 집사람은 이것이 잘 안 된다. 이것 때문에 가끔 툭탁거린다. 커피 스푼으로 휘휘 저어 알갱이를 녹이고 한 모금 마신다. 매일의 일과이긴 하지만 제일 편안하고 아늑한 시간이다. 코로 맡는 진한 커피 향은 아침을 깨운다. 잠깐의 여유가 있어 어제부터 읽기 시작한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펼쳐 들었다. 인간의 본래 적 심성이 어떠한 존재인지, 인간의 살아내는 의지는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갈 시간이 되었다. 가방에 책과 안경과 수첩, 볼펜 등을 챙겨 넣고 집을 나선다. 늘 가던 길 말고 다른 길로 가본다. 그래봐야 어디서든지 만날 테니, 아니면 도로 찾아가면 될 일. 앞차가 저속 주행을 한다. 2차선으로 빠져 흘끗 운전자를 본다. 그리고 구시렁댄다. 저럴 바엔 차를 끌고 나오질 말든지 하고. 광교 호수공원을 거쳐 도착하니 10시 40분. 문을 열고 집안에 들어가 커튼을 열어 놓는다.

잠시 후 문 여는 소리가 들린다. 손자하고 불러본다. 이 친구는 언제나 답이 없다. 가만가만히 들어와 얼굴을 조금 내밀고 눈인사한다. 팔을 활짝 벌리고 웃자 달려와 안긴다. 무릎에 앉히고 그간의 동향을 묻고 답한다. 제일 중요한 과제인 점심 문제 토론이 이어진다. 몇 시에, 어디서, 무엇을 먹을 것인지 물었다. 손자는 돈가스를 제일 좋아하는데 얼마 전에도 먹었다고 한다. 그럼 어떤 걸로 할까? 잠시의 고민 후 같은 걸로 결정. 시간은 12시, 장소는 근처 백화점.

시간이 되어 차에 타고 네비에 입력하려는데 손자의 참견이 시작된다. 자기가 잘 아는 길이니 그냥 가자고, 아니라고 그래도 길 안내받고 가는 게 좋다고. 가는 길에 세상 참견 다 한다.

요즘 아이들 가르치는 선생님은 골치깨나 아프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도 이렇게 응대하기가 힘이 드는데 저런 애들 스무 명이라니? 평일인데도 지하 5층까지 가서야 주차 공간이 나왔다. 처음 오는 장소이니 손자에게 길 안내를 시켰다. 지하 5층에서 지하 2층까지 에스컬레이터를 타잔다. 아무런 생각 없이 올라오는데 지하 2층에 도착하자마자 쏜살같이 달려간다. 허겁지겁 따라가니 VIP 주차장이 나온다. 여기서 손자의 일장 연설이 시작된다. 저 차는 마이바흐고, 저 차는 푸조, 외제 차 위주로 주차해 놓은 곳이었다. 많이 와 본 솜씨다. 우리 아들도 어릴 때 차를 좋아해서 장난감이 꽤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 친구의 차 사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고급 차량에 대한 정보가 전문가 뺨친다.

차량 가격부터 몇 cc급 인지, 특히 람보르기니와 비교하길 좋아한다. 건성으로 답해 주자 짜증을 낸다. 진정성을 갖고 답하라고 한다. 여기서부터 9층까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랐다.

9층에 식당가가 밀집되어 있다. 손자의 단골 점포 돈가스집에 가서 주문하는데 손자가 귓속 말한다. 잘 들리지 않아서 되물어 본다. 소스는 따로 주고, 깨는 뿌리지 말라 한다. 네가 주방 아저씨한테 직접 이야기하라고 하자 짜증을 낸다. 하비가 하라고. 주문하고 자리에 앉아 놀려주었다. 바보 손자라고. 그것도 말 못 하면서. 손자 바보, 하비 바보 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바보라고 한참을 놀려대고. 음식이 나왔다. 내 건 부먹, 손자 건 찍먹으로 가져와서 칼로 잘라먹으라고 칼을 주니 잘라 달란다. 녀석이 먹기 좋게 잘라주고. 혹시 몰라 내 밥은 먹지 않고 남겨 놓았다. 손자가 밥을 싫어하느냐고 묻는다. 아니라고 어서 먹으라고 답 해주고, 단무지도 먹으라고 하니 성질을 낸다. 왜 먹기 싫은 걸 먹으라 하냐고. 어렵다. 손자는 어렵다. 역시나 밥이 부족하다. 손자가 할아버지 밥 먹을 거냐고? 얼른 떠서 그릇에 옮겨 주었다. 역시 먹보다. 돈가스 3분의 2와 쌀밥을 다 먹고야 물러난다. 물을 먹으라 하자 찬물만 먹는단다. 난 손자의 식성 전체를 모른다. 나하고는 너무 다르다.

다시 집으로 오는데 현관문을 열고 바로 닫으려고 하면서 장난을 친다. 당연히 힘이야 아직 내가 더 세다. 강제로 개방하고 들어가자, 우산으로 찌른다. 우산을 빼앗아 연속으로 가격. 자기는 한 번 했는데 하비는 너무 많이 했다고 삐진다. 밖으로 나가기에 내버려 두었다. 잠시 후 딸에게 전화가 온다. 하비가 자기를 괴롭힌다고 혼자 있을 테니 하비는 하비 집으로 가란다.

전화해서 할아버지가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휴대폰을 달란다. 왜? 게임을 하고 싶다고 하여 하비 폰에는 게임이 없다고 하자 자기가 깔아서 하면 된단다.

드디어 오후 3시 30분 손자를 아파트 정문까지 데려다주고 해방되었다. 총 5시간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우리 아이들 키울 때랑 다르다. 순수하게 기뻐할 줄 알고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감정을 드러낼 줄 아는 아이가 부러울 때도 있다. 미디어에서도 아이들이 표현을 잘하게끔 북돋아 주라고 하는 이야길 들었다. 튀는 아이들이 좋다고. 우리 자랄 때와는 너무 다르다. 우리는 어릴 적 감정을 드러내면 어른들께 혼이 났었다. 버릇없다고. 집사람의 노고가 느껴진다. 아이 돌보기는 역시 어렵다. 2025.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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